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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공고
Are you Fuckin' Happy now? /2006.1.13.
Ceteris Paribus 2006/04/04 06:14 분출의 욕구와 쾌감, 그리고 행복의 상관성에 대하여
얼마전에 어떤 만화책에서 우연히 본 이야기이다. '진정한 격투란 힘의 억압된 힘의 발산이며, 인간은 이를 통해서 쾌감을 얻는다'고 하더라. 한편 또한 얼마 전에는 네덜란드 작가가 쓴 소설책에서 이런 소리도 읽었다. '음악가란 감정의 결과를 음악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과연 분출한다고 하는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혹은 분출이라는 것과는 다른 스펙트럼의 행복이 있는 것일까?
오늘날의 경제학에서 재화의 소비와 이로 인한 효용의 상승은 과연 진정한 상관성을 갖는 것인가하는 이러한 문제는 과거 '한계혁명'의 단계를 통해서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인간의 단위당 한계 효용은 소비량이 늘어날수록 증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려하고 있는 점은 모든 효용은 같은 질적 수준을 보인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행복이란, '분출'이라는 방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을 통해서 얻어진다. (안그래도 지금 Andy Timmons의 'Money'를 듣고있다. 과연 That's what i want다) 말하자면 획득에도 절제의 미덕이 필요하며 적당한 선에서 그만 더해야 효용(쾌감)이란 절정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획득의 미덕이 방출이라는 형태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인간이 갖는 방출의 기능, 효용(쾌감)이란 순전한 감정적인 것이다. 아닌말로 얻어서 얻는 효용이 있는 반면 방출을 통해 얻는 효용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비근한 예로 위에서 언급한 '힘의 방출'이라든지 혹은 '감정의 분출'이 그것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출의 효용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이러한 방출의 양을 어떻게 경제학적으로 측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분명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학이라면 사회적으로 정해진 (혹은 생산된) 자원량을 분급하는 데에서 경제학적인 분배가 가능하지만 그와는 반대인 상반된 '방출'의 영역은 어떻게 구획할 것인가, 혹은 이를 어떻게 가치평가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역시 방출에도 일정한 한계의, 제한선이 있을 것이며 이 역시 획득에서 얻는 효용을 획일화하여 제한할 수 있다면, 이러한 방출의 제한선도 일정하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출이 무한정 계속되고, 방출량의 제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개인의 한도량 외에 사회적인 방출 한계량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을 힘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힘의 방출은 사회적인 형태로 제한된다. 정식 운동경기라든지 최근 유행하는 이종격투기 같은 형태로 말이다. (말하자면 이런것들도 간접적인 방출의 욕구를 사회적으로 구획한 것일 것이다. 시청과 열광에서 만족하라는 것이지.) 나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방출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제한할 것인가(혹은 구획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인 자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생각해보면 굉장한 삽질인 것 같지만(사실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획득만이 효용이 아니라, 방출이 효용을 준다면, 그것을 통해 사회적인 자원배분을 이룩하여 모두가 즐거워 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나하는 것. 생각이 계속되는 대로 다음글을 쓰도록 하자.
얼마전에 어떤 만화책에서 우연히 본 이야기이다. '진정한 격투란 힘의 억압된 힘의 발산이며, 인간은 이를 통해서 쾌감을 얻는다'고 하더라. 한편 또한 얼마 전에는 네덜란드 작가가 쓴 소설책에서 이런 소리도 읽었다. '음악가란 감정의 결과를 음악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과연 분출한다고 하는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혹은 분출이라는 것과는 다른 스펙트럼의 행복이 있는 것일까?
오늘날의 경제학에서 재화의 소비와 이로 인한 효용의 상승은 과연 진정한 상관성을 갖는 것인가하는 이러한 문제는 과거 '한계혁명'의 단계를 통해서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인간의 단위당 한계 효용은 소비량이 늘어날수록 증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려하고 있는 점은 모든 효용은 같은 질적 수준을 보인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인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행복이란, '분출'이라는 방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을 통해서 얻어진다. (안그래도 지금 Andy Timmons의 'Money'를 듣고있다. 과연 That's what i want다) 말하자면 획득에도 절제의 미덕이 필요하며 적당한 선에서 그만 더해야 효용(쾌감)이란 절정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획득의 미덕이 방출이라는 형태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인간이 갖는 방출의 기능, 효용(쾌감)이란 순전한 감정적인 것이다. 아닌말로 얻어서 얻는 효용이 있는 반면 방출을 통해 얻는 효용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비근한 예로 위에서 언급한 '힘의 방출'이라든지 혹은 '감정의 분출'이 그것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출의 효용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이러한 방출의 양을 어떻게 경제학적으로 측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분명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학이라면 사회적으로 정해진 (혹은 생산된) 자원량을 분급하는 데에서 경제학적인 분배가 가능하지만 그와는 반대인 상반된 '방출'의 영역은 어떻게 구획할 것인가, 혹은 이를 어떻게 가치평가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역시 방출에도 일정한 한계의, 제한선이 있을 것이며 이 역시 획득에서 얻는 효용을 획일화하여 제한할 수 있다면, 이러한 방출의 제한선도 일정하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출이 무한정 계속되고, 방출량의 제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개인의 한도량 외에 사회적인 방출 한계량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을 힘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힘의 방출은 사회적인 형태로 제한된다. 정식 운동경기라든지 최근 유행하는 이종격투기 같은 형태로 말이다. (말하자면 이런것들도 간접적인 방출의 욕구를 사회적으로 구획한 것일 것이다. 시청과 열광에서 만족하라는 것이지.) 나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방출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적으로 제한할 것인가(혹은 구획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인 자원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생각해보면 굉장한 삽질인 것 같지만(사실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로지 획득만이 효용이 아니라, 방출이 효용을 준다면, 그것을 통해 사회적인 자원배분을 이룩하여 모두가 즐거워 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나하는 것. 생각이 계속되는 대로 다음글을 쓰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