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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손가락 2008/11/29 23:45
 최근에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을 읽었다. 꽤 긴 소설이다. 작가가 인간의 원죄와 그에 대한 고뇌를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에 만년에 전력을 다해 쓴 소설이라고 한다.

인간은 살아야한다. 가능성이나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생존에 우선하는 문제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스타인벡은 말 그대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선과 악의 한 편에 온전하게 몸 담을 수 없는 존재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선과 악의 완전체임을 보이고 싶었던 인물(캐시와 아론) 모두가 (사실상의) 자살을 하는 것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타인의 삶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을 가진 두 인물(톰과 칼렙)을 대조적으로 보이면서 사실상의 상반된 결말을 보이는 것으로 인간의 생존과 죽음의 선택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죄책감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뇌 속에서도 그것을 견디는 삶이라는 사실상의 결말을 내리면서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서 인간의 선택권을 거론한 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인지 생각해 볼 만 하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한 선택권 자체에 인간의 존엄성이 부여되었다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인간이 삶을 택하든 죽음을 택하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해 자신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방점을 찍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물의 선택에 대해서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마찬가지의 기로에 선 인물의 선택의 기로에서 (사실상 개입된 작가의 목소리로) 그러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각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원죄라는 의식 속에서 자신의 삶을 무기력하게 내주기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여 그것에 잡혀먹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애원이 들린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실천하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러한 생존이 존엄의 문제에 대한 간단한 답이 되는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다. 즉, 죄의식의 극복과 '그럼에도 불구한' 삶의 영위가 과연 존엄을 실천하는 행위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실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해 '그렇다'라는 다소간은 교조적 관점을 지향하는 듯 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와는 다르게 생각한다. '생존'이라는 것이 과연 무조건적인 옮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은 해 보아야 한다. 삶과 죽음의 선택이 있다면 죄의식과 무관하게 자신의 삶의 고통을 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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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조

Ceteris Paribus? 2008/11/09 02:41
내가 미국 대선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질 시간도 없거니와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어떤 영향력이 있던 것도 아닌지라 가끔 신문에 나오는 기사들이나 보면서 시국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바마가 당선되었다. 보아하니 시중에 이 미국 대통령 후보에 대한 책이나 기사가 엄청나게 많은 것 같다. 생각해보면 오바마는 이제 슬슬 공화당의 경찰놀이나 마블코믹스 캐릭터 놀이를 그만두고 정책입안을 할 모양이다. 뭐, 마블코믹스 캐릭터 중에도 흑인 영웅이 있긴 하지만 썩 거기에 흥미가 있는 사람 같지도 않거니와. 하여간 오바마는 다시 70년대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의료보험 개편, 연금제도 개편, 자국 산업 보호를 위시한 보호무역(의 가능성), 배경과 동기는 완전히 반대지만 먼로 할아범처럼 해외국가에 대한 내정 불간섭도 나올 법한데 그렇게 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궁금한 것은 과연 오바마가 미국에서 IT 붐 이후에 급격히 고조된 -  이미 16년이나 된, 그리고 얼마전 절정에 이른 - 미국 내부의 도덕적 해이 상태를 어떻게 극복할 지, 그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해이가 한국에서도 '선진적 경쟁 문물'로 둔갑해 서민 경제를 상당 부분 갉아먹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이 한국에게 과연 전범이 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할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민간부문에 대한 규제에 찬성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뿌리깊게 염두에 두는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기본 가정과  맞물린 것인데 - 나는 어쩐지 모르겠으나 - 인간의 무한한 욕구가 결정적으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의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즉, 자유로운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제제를 가할 확률, 말하자면 적당히 해먹는 선을 지킬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나 IT 붐의 외관상의 버블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치적 거품이 줄어들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혹은 운용했던 자들에게 폭넓게 퍼진 기회주의와 협력의 부족이다. 말하자면 배반의 가능성이 보다 높게 형성되어 있으며, 이로 인한 손실을 높은 '한 방'으로 해결하려는 투기적 행태가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종래 일부 관련 종사자들에게서 비 종사자들에게로 폭넓게 전염되었다. 덕분에 미국에 뮤츄얼 펀드 열풍이 불 수 있었고, 이를 빌미로 금융기관은 엄청난 양의 수수료를 집행하는 스위스 은행과 같은 (비도덕적) 행태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 은행은 이자를 주지 않고 보관료를 받는다. 다만 자금에 대한 출처를 전혀 공개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장 전체에 확산된 불신과 배반의 가능성을 줄이고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전세계적인 불황 및 금융 위기의 극복에 있어 근본이라 보인다. Secret market을 살리려면 secret이 필요한 셈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한국 정부는 그러한 면에서 정책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적어도 서민 및 일반 투자자 대부분에게는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 당선 당시의 장밋빛 공상과는 반대로.  새로운 미국 행정부는 이러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처벌 규정과 제한 선을 제시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10여년의 정책의 일관된 유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애초에 그러한 위험에 대한 가능성을 타개한 것이 60여년이 지난 시점 - 1930년대 대공황 - 에서 터져나온 문제인지라 특별한 제약이 없던 상태에서 소위 말하는 것처럼 'fully exploited' 된 상태이므로 그러한 제한에 익숙해져 규정이 없어진 후에도 일상화 될 시간적 여유는 대략 10여년이라고 보며 가능하다면 그러한 규정을 (영원히) 지속시켰으면 한다. 16년의 파티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특히 지금 금융가의 중심에 있는 자들에게는 거의 경력 초년부터 그러한 비정상적 파티가 '정상적'인 매일의 삶이었으니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적응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파티는 가끔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이런 잡글들을 쓰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인간은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음과 자기 규제가 없으면 인간은 예외없이 완전히 파멸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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