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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2/06 믿음, 맹신, 무지.

복지망국

손가락 2012/02/24 14:50

인터넷을 통해서 내가 자주보는 종류의 것들을 분류하자면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되는데, 첫 번째는 연합뉴스의 글로벌 경제 기사이고 두 번째는 한국 프로야구 기사들이고 세 번째는 웹툰이다. 첫 번째 것과 나머지 것들의 차이를 굳이 따지자면 첫 번째 기사에는 댓글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두 번째나 세 번째 것들은 기사를 보는 시간보다 댓글을 보면서 웃는 시간이 더 많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각설하고, 그리스의 구제금융과 긴축정책 이행이 최근 글로벌 경제 파트의 핫이슈인데 가끔 한국 신문들에서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 아직도 그리스가 겪고 있는 문제가 과도한 복지에서 비롯되었다는, 말하자면 복지망국의 신조들을 읊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그 문제가 사실 누구탓인지를 책임소재를 정확하게 해보자는 생각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 원인은 당신같은 노인네들 탓이라고 하겠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득권의 이익을 즉시적으로 볼 수 있는 정책에는 '복지'라는 이름으로 근거없는 인센티브를 남발한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반면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국민들의 전체적 복지수준과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정책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말하자면 정책의 비효율성이 만들어는 극단적인 반례인 것이다. 뭐, 고위공무원 수당 인상하고 이미 납부된 연금납입액 보다 높은 연금배당금을 받겠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게 복지제도라고 말하고 싶다면 할 수 없지. 그렇게 치면 대학 등록금 인상도 장기적으로는 교원들의 임금향상분에 기여하므로 그것도 복지정책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먼산).

지난 번 포스팅한 글 - '거시호구의 거시' - 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동태적 비일관성이 이러한 재정 파탄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한 부분이 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지금의 그리스의 상황이 상당히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무엇이 동태적 비일관성이며, 그것이 어떻게 정책의 비효율성을 초래하는지를 생각해보고 조금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작금의 복지 '포퓰리즘' 논쟁이 어떻게 논점을 흐린 물타기를 시도하는지를 이야기해보자.

논점이 일관된 정리된 글을 링크해둔다. 아래 링크의 글을 읽고 이 글을 읽는다면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링크-프레시안>

1. 첫 번째, 동태적 비일관성이 어떻게 구현되었는가.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조삼모사의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오늘 세 개인가 내일 네 개인가를 오늘 결정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 네 개를 생각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러한 문제를 결정하는 입장에서 나눠 먹어야 할 사과를 자신들의 주머니에 챙겼다는 점이다. 비유에서 벗어나 생각해보자면 국회의원들이 예산안을 짜는데, 그 예산안을 증액하면서 자신들의 판공비도 높이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판공비가 여타 국민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복지정책에 돌아가야 할 것이었고, 그러한 복지정책의 장기적 누락이 전체적인 국가 생산성의 하락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지적하였듯, 국가부채란 미래의 국가 생산성 혹은 성장률에 대한 기대의 반영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그렇기때문에 국가부채를 돌려막는 - 영어로도 rolling한다고 하는데 - 상황을 가능하게 하려면 최소한 현재의 성장률을 부채의 만기가 형성되는 기간까지는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결정의 권한을 가진 그리스의 정책결정권자들은 본인들이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러면서도 그 대상범위가 명목상으로는 무차별적인 정책에 많은 재정을 할애한다. 한국으로 치자면 교육 재정을 증액하면서 그 증액부분의 상당수를 외고/과고 혹은 고급 사립학교에 할당하는 식일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명목상으로 그러한 재정 할당은 '복지'이지만 그 수혜 계층은 철저하게 일부에 국한된 형태였던 것이다. 반면 그러한 재정의 부담은 세금과 국채 발행을 통해 국민 대다수에게 분담을 시킨 것이고. 이러한 상황은 소위 말하는 '주인-대리인 문제 - Principle-Agent problem' 와도 얽혀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추후 다른 포스팅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여간 그러한 장기적인 성장률의 유지라는 전제가 노동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를 통해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졌어야만 어찌되었건 증액된 재정의 부담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부채의 만기와 함께 찾아온 생산성 하락은 국채 발행을 통한 재정의 돌려막기의 가능성을 무너뜨렸다.

2. 복지 '포퓰리즘'의 물타기
 
일단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했는지 모를 정체모를 외래어의 한글 표기에 비웃음을 흘릴 뿐이다. 한글 맞춤법의 '오렌지'를 무시하고 '아륀지'라고 우기시는 분들이 영어로도 한글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외래어를 왜 사용하시는지.

작금의 복지정책 - 정확히는 무상급식 - 이 이를 통해 대중인기에 편승하는 정책이라는 비판하는 입장인데, 문제는 그러한 복지정책의 가장 큰 수혜계층이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가정형편이 넉넉한 집 아이들까지 무상급식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이전부터 가정형편이 넉넉치 못했던 아이들이 그 수혜를 선택적으로 받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복지의 수혜가 전체에게 제공됨으로서 선택적 복지가 주었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한다면 그것을 복지의 혜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려나.

문제는 이 복지의 수혜를 통해 일반대중의 효용증가가 생산성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이다. 효용의 증가가 장기적으로는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온다면 이러한 생산성의 향상이 국가 성장률의 토대가 된다는 주장에는 딱히 토를 다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급식을 통해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선택적 급식을 받는 아이들은 그 존재가 어찌 되었든 다른 아이들에게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런 아이들은 -그렇지 않을만큼 생각이 건강한 아이들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하지만 - '밥 빌어먹는' 아이라는 인식을 친구들에게 주게된다. 그러한 상황은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들 사이를 구분짓는 눈에 띄는 차이가 되게 마련이다. 최근의 패딩논란을 보면서 아이들이 그들 모두를 순수하게 대한다는 환상 속의 그대는 없으리라 가정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결국 구분지어진 아이들은 학교 생활에서의 적극성을 잃게 되고 학업성취나 교우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확률이 높다. 학업 성취를 학교에서의 생산성으로 치환하자면 요즘처럼 공교육의 질 하락문제가 논란이 되는 와중에서는 그들이 사교육의 수혜를 받지 못할 확률이 더욱 높으나, 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학업성취의 저하는 대다수의 경우 피하기 힘들다. 본인의 과거 경험만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러한 사례가 있음을 더욱 강하게 인증할 수 있다.

이를 사회 전체의 생산성으로 연결지어 생각해보자. 요즘 소위 말하는 보수논객들이 '젊은이들이 꿈이 없고 도전이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전무한 사회 복지망이 그 원인이다. 즉, 보수논객들이 한창일 나이에는 실패와 재기에 대한 가능성이 충분했다. 말하자면 시골에서 빈 손으로 상경해서 실패해도 어디선가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임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을 강요받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계층이 소수였으며 사회 전체가 발전 초기단계였으므로 노동력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그렇기때문에 취업의 가능성이 높았으며, 그러했기 때문에 허언섞인 '술마시고 면접을 보러가도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던 자랑이 완전히 헛소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노동계층, 특히 처음 취업을 준비하는 세대들은 술마시고 면접을 보러갔다가는 면접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굳이 현세대가 취업 과포화 상태임을 증명할 증거들을 일일히 나열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취업에 실패한 이들이 직장 밖에서 얻을 수 있는 복지의 범위는 극도로 한정되어 있다. 굳이 말하자면 기초 건강보험과 취업 교육정도. 최근 어떤 자동차 관련 전문지에서 외국의 아웃도어 인구는 대부분이 20-30대들이나 한국은 40-50대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사무실과 도서관에 탕진하지 말라는 요지의 기사를 보았는데, 그러한 상황에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미국만해도 미취업 상태에서 받을 수 있는 실업수당이 최대 99개월이다. 그 액수가 적을지언정 말하자면 7-8년은 명목상 국가에서 주머니에 용돈이라도 찔러 넣어준다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직장과 관계없이 건강보험이 일괄적용된다. 놀고 먹다가 다쳐도 병원가면 어쨌든 적은 돈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전후사정을 고려도 하지 않고 젊은 세대들의 '안이'와 '나태'를 탓하는 당신들은 그 나이에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물론 민주화와 미래 세대를 위해 자신을 투신하신 분들도 많지만 그 분들은 대부분이 고 김근태 전 의장처럼 고통속에서 여생을 보내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 앞에서 병나발을 불며 안일함을 탓하는 이들의 과거가 지금 그들이 보이는 추태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갑작스런 열폭에서 벗어나 사회 안전망의 부재가 어떻게 생산성의 저하로 이어지는지 생각해보자. 한국의 경우 노동/기술집약적 산업에 산업경쟁력이 맞춰져있는데 전자제품/차량/선박 조립/생산 등이 대표적인 업종이다. 문제는 그러한 산업들의 경쟁력이 최근에는 기술, 디자인 등과 같은 요소들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의 생산성은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창의성'의 발달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아저씨들이 생각하는 '창의성'은 '창의성 개발 학습지'를 아이들이 잘 푸는 것으로 측정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정의하는 창의성은 실제의 창의성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고, 실제의 창의성은 개인 스스로가 가진 경험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사회 안전망의 부재는 실패의 위험부담을 그대로 본인이 떠안게하여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의 폭과 깊이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의 다양성의 부재는 창의성의 부재로, 이러한 창의성의 부재는 생산성의 부재로 이어진다.

글이 너무 장황하게 긴 길을 돌아온 느낌이 없지 않은데, 여간은 일반 대중에 대한 복지가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결과와 연결될 충분한 고리를 찾는다면 복지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그 추상과 같은 호통은 동네 바보형의 외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에 복지가 망국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복지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근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일부 만이 선택적으로 정책의 효과를 독점하는 것을 독점이라고 그들이 인지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복지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주장은 액면 그대로 맞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을 소위 말하는 주류 언론과 정당이 여과없이 흘려보내는 상황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야 말로 한국의 언론과 정치가 얼마나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2012/02/24 14:50 2012/02/2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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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맹신, 무지.

손가락 2012/02/06 15:07
많은 사람들, 특히 그 중에서도 종교인(혹은 신앙인)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과연 맹신과 확신의 경계선은 어디인가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은 기독신앙에서 비롯된 설교 및 강론을 들을 때는 그러한 의문이 더욱 강하게 든다. 나는 사회에서 그러한 신앙들이 내포한 - 혹은 주장하는 - 교조적 지침을 여과없이 받아들여 맹신이 무지의 형태로 전이되는 - 혹은 이미 전이된 - 형태를 보면서 과연 그러한 위험을 내포한 신앙적 지침이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 혹은 그것이 현대 - 혹은 근대 - 의 역사적 흐름과 필연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가변적이나마 일관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즘 이런 포맷을 내가 자주 사용하는 것 같지만 작자의 위치에서 매우 유용한 포맷이기에 계속 재탕해 보자면, 이 글은

1. (기독)신앙의 인식론적 기원에 대한 논의
2. 현(근)대의 인식체계와의 합치성과 이에 대한 적용점

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럼 시작해보자.

첫 번째로 이야기 할 것은 신앙의 인식론적 기원에 대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격적 일신론 - 범신론, 자연신론과는 다른 - 에 대한 인식론적 기원에 대한 가설과 이에 대한 논의를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인간이 세운 세계관과 이에 대한 메타-체계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가보고자 한다. 이러한 가설의 아이디어는 괴델의 증명 - 수학 체계와 수학 체계를 조직화하는 메타-체계의 증명 불가능성에 대한 증명 - 에서 비롯하였다.

어떠한 체계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체계를 조직화하는, 혹은 그러한 체계가 내부에서 일관된 형태로 작동하게 하기 위한 규칙이 필요하다. 수학 체계를 조직화 하기 위해서는 수학의 기본 원칙들, 추상화된 수에 대한 숫자로서의 이름 붙임(기호화), 연산 기호들의 작동에 대한 공리 부여 등의 작업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셀 수 있는 실제 물건들을 추상화된 숫자 기호로 짝짓는 규칙, 더하고 빼는 기호들에 대한 규칙의 설립 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결과가 모순이 없이 작동할 때에 그러한 체계가 일관된 - 혹은 무모순적인 - 체계라고  말을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체계 내부에서 그러한 체계에 무모순적 규칙성을 부여하는 메타-체계 - 혹은 상위 체계적 원칙 - 들의 참/거짓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가이다. 괴델은 그러한 증명이 체계 내부에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증명을 해 내었고, 이것은 단순히 수학 체계의 완전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는 모든 체계의 완전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체계 안에서도 그러한 체계(의 규칙) 자체의 참됨 여부 자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체계가 무모순성을 가졌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무모순성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상위 체계적 원칙들이 필요하다.

왜 살인을 해서는 안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러가지 답을 할 수 있다. 살인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이며 그 가족들에게 고통은 주며, 피살자는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등등. 그런데, 죽은 사람이 그것을 원했는지 아니었는지 어찌 알것이며, 가족, 친지, 친구 하나 없는 천애 고아는 그럼 죽어도 되는가라는 문제가 생기며 왜 사람은 먹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면서 같은 사람은 죽이면 안되는가에 대한 질문이 따라나온다. 누구도 그러한 질문이 완벽한 답을 하기는 힘들 수 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그것이 선하지 않은, 혹은 신에 의해 금지된 행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이 아닌 이상 - 이데아 idea - 적 원칙에 의해 그러한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내왔으며, 그러한 규칙들이 인격화된 형태가 바로 인격론적 신의 형태이다. 많은 소설이나 글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라는 이야기의 맥락이 바로 가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자신들이 도달할 수 없는, 자신들의 세계와는 유리된 세계에서 비롯했다고 하는 원칙들을 통해 자신들의 체계의 일관성을 부여했으며, 이것이 바로 이데아이며, 신이며, 옥황상제이며, 하느님의 모습인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들의 세계를 규칙적으로, 혹은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러한 체계에 규칙성을 부여하는 원인을 자신들의 체계 외부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계 외부에서 비롯한 원칙들은 인간 세계에서는 그러한 원칙의 참됨을 증명할 수 없으며, 그러한 규칙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딱히 그러한 원칙들을 정당화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한 규칙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한 원칙에 대한 의문과 문제제기가 계속 되어왔으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체계 내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불과 백여년 전에 증명되었다.

여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즉, 자신들의 체계에 대한 규칙성을 자신들이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다. 즉, 체계 내부에서 체계를 지배하는 또 다른 원칙들을 생산하며 폐기하는 체계라는 것이다. 굳이 압축적으로 표현 하자면 자가발전적 체계 - self-generating system - 라는 것인데, 이러한 원칙들의 생산과 폐기를 통해 인간 사회가 발전해나왔음을 역사적인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독자의 시간과 정력을 빼았는 동시에 본문의 진행속도에 지대한 저해를 가할 것이므로 양해를 구하고 넘어가겠다. 그런데, 이러한 자가발전적 체계를 설명하는 또다른 이름의 이론이 있는데, 이는 독자 모두가 이미 기대하고 있었듯이 진화론이다.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가 체계를 지배하는 원칙을 제기하고 수립하는 과정이 하나의 진화적 단계를 거치며, 그러한 체계 자체가 생물의 진화적 적응과 같은 양태의 단계를 거치며 변화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두 번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다. 인격적 일신론이 (근)현대의 사회와 과연 합치할 수 있는 상위 체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들을 생각해보자. 이에 대한 답변은 부분적 긍정과 부분적 부정을 담고 있다. 부분적 긍정은 역사적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이에 대해서 체계 내부에서 참/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원칙을 - 아직은 - 제공 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의 긍정이며, 부분적 부정은 인간이 체계와 상위 체계의 논리적 관계를 표면적으로 인지한 상태에서 인격신론이 과연 상위 체계의 전근대적 형태에 불과하였음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에서의 부정이다.

인간이 역사를 거치며 많은 체계들을 설립/수정/폐기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체계 안에서 살아남아온 상위체계적 원칙들이 존재한다. 이를 테면, 살인 - 혹은 생명을 해하는 일 - 은 옳지 못한 일이다 라는 것 같은 원칙이다. 말하자면, 선과 악이라는 원초적인 행동 양식에 대한 대원칙이 필요한데, 이러한 대원칙의 근거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그냥,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는, 혹은 하면 안될 것 같다는 막연한 원칙이나 '양심'에 의해서 제어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를 법률적 은어로는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형태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인격신에 근거한 신앙 체계는 자신의 양심과 대칭적인 인격을 가지면서도 전지적 시점을 가진 인격신의 관찰을 전제로 하고 하므로 이러한 제어에 대한 효과적인 자기합리화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원칙들이 체계 내부에서 근거를 찾기는 힘든 것들이지만 체계 자체를 무모순적 체계로 작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원칙들이며, 그러한 원칙의 작동에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바라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체계의 작동에 필요한 원칙의 효율을 더해주는 효소라고 해서, 그것들이 부수적으로 포함하는 폐기되어야 마땅한 전근대적 원칙들을 아직도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비합치성을 제기하는 첫 번째 질문이 될 수 있겠다. 즉, 인격신론적 신앙관 자체가 하나의 패키지로 묶이면서 그 안에 과거의 사회에서 포함되었던 원칙들이 동시에 전승되어 왔는데, 그 중에서는 아직 쓸모가 있는 것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유용성에 의심을 하게 되는 원칙들이 포람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의 구약 성서에서 주장하는 배척적인 일신론인데, 다른 신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신이나 민족에 대한 철저한 배척을 지시한다. 신약에서 이러한 배제가 완화되긴 하지만 여전히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독단적인 체계의 완비성에 대한 주장은 체계가 가진 (상위 체계적) 원칙들을 설립/수정/폐기하는 과정에서 방해적 요소가 될 수 있다. 즉, 진화의 원칙 자체를 부정하는 진화 내부의 원칙이 존재하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괴델의 발견이 알려진 지 불과 백여년이 지난 이후 이러한 인격론적 신앙관이 일개 시정잡배의 블로그에서 그 논리적 위치에 대한 공박을 당하고 있는 마당에,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인격론적 신앙관이 상위 체계의 역사적 종류에 불과했음을 인정하지 않고 독보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15-6세기 당시에는 전문 지식인만이 알던 케플러의 원칙을 통해 지동설이 주장되고 알려졌지만, 지금에 와서는 중학교 과학교과서에 그러한 내용이 설명되어 상식으로 인지되고 있는 것처럼, 현재는 일부만이 인격론적 신앙관의 논리적 위치에 대해 논박하고 있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에도 현재와 같은 위치를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격론적 신앙관은 인간의 인식 체계의 진화 과정에서 거쳐가고 있는 단계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나 논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인격론적 신앙관 자체가 인간의 인식 체계를 조직화하는 상위 체계적 특성들에 적합한 특성을 지녔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위 체계적 적합성이 신의 존재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의 인식 체계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를 조직화 하는 상위체계로서의 논리적 역할과 그러한 역할이 진화 과정의 일부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된 (근)현대의 인식 체계에서는 일부 인격론적 신앙관이 주장하는 전근대적 원칙들이 반드시 폐기되어야 할 확실한 근거가 존재한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추신 : 최근 들어 글이 일정한 형태를 지니며 고착화 된다는 생각도 하게되고, 지나치게 현학적인 논의를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된다. 어느 것이든 좋지는 않은 경향이건만 이를 개인 블로그라고 해서 그냥 두어야 할지, 혹은 적어도 표면적이나마 문체에서라도 변화 - 차마 개선이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고로 - 를 시도해야 할 지 모르겠다.
2012/02/06 15:07 2012/02/0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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