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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맹신, 무지.

손가락 2012/02/06 15:07
많은 사람들, 특히 그 중에서도 종교인(혹은 신앙인)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과연 맹신과 확신의 경계선은 어디인가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나 한국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은 기독신앙에서 비롯된 설교 및 강론을 들을 때는 그러한 의문이 더욱 강하게 든다. 나는 사회에서 그러한 신앙들이 내포한 - 혹은 주장하는 - 교조적 지침을 여과없이 받아들여 맹신이 무지의 형태로 전이되는 - 혹은 이미 전이된 - 형태를 보면서 과연 그러한 위험을 내포한 신앙적 지침이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 혹은 그것이 현대 - 혹은 근대 - 의 역사적 흐름과 필연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가변적이나마 일관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즘 이런 포맷을 내가 자주 사용하는 것 같지만 작자의 위치에서 매우 유용한 포맷이기에 계속 재탕해 보자면, 이 글은

1. (기독)신앙의 인식론적 기원에 대한 논의
2. 현(근)대의 인식체계와의 합치성과 이에 대한 적용점

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럼 시작해보자.

첫 번째로 이야기 할 것은 신앙의 인식론적 기원에 대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격적 일신론 - 범신론, 자연신론과는 다른 - 에 대한 인식론적 기원에 대한 가설과 이에 대한 논의를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인간이 세운 세계관과 이에 대한 메타-체계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가보고자 한다. 이러한 가설의 아이디어는 괴델의 증명 - 수학 체계와 수학 체계를 조직화하는 메타-체계의 증명 불가능성에 대한 증명 - 에서 비롯하였다.

어떠한 체계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체계를 조직화하는, 혹은 그러한 체계가 내부에서 일관된 형태로 작동하게 하기 위한 규칙이 필요하다. 수학 체계를 조직화 하기 위해서는 수학의 기본 원칙들, 추상화된 수에 대한 숫자로서의 이름 붙임(기호화), 연산 기호들의 작동에 대한 공리 부여 등의 작업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우리가 셀 수 있는 실제 물건들을 추상화된 숫자 기호로 짝짓는 규칙, 더하고 빼는 기호들에 대한 규칙의 설립 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체계 안에서 만들어진 결과가 모순이 없이 작동할 때에 그러한 체계가 일관된 - 혹은 무모순적인 - 체계라고  말을 한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체계 내부에서 그러한 체계에 무모순적 규칙성을 부여하는 메타-체계 - 혹은 상위 체계적 원칙 - 들의 참/거짓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가이다. 괴델은 그러한 증명이 체계 내부에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증명을 해 내었고, 이것은 단순히 수학 체계의 완전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는 모든 체계의 완전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체계 안에서도 그러한 체계(의 규칙) 자체의 참됨 여부 자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체계가 무모순성을 가졌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무모순성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상위 체계적 원칙들이 필요하다.

왜 살인을 해서는 안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러가지 답을 할 수 있다. 살인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이며 그 가족들에게 고통은 주며, 피살자는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등등. 그런데, 죽은 사람이 그것을 원했는지 아니었는지 어찌 알것이며, 가족, 친지, 친구 하나 없는 천애 고아는 그럼 죽어도 되는가라는 문제가 생기며 왜 사람은 먹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면서 같은 사람은 죽이면 안되는가에 대한 질문이 따라나온다. 누구도 그러한 질문이 완벽한 답을 하기는 힘들 수 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그것이 선하지 않은, 혹은 신에 의해 금지된 행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인간이 아닌 이상 - 이데아 idea - 적 원칙에 의해 그러한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내왔으며, 그러한 규칙들이 인격화된 형태가 바로 인격론적 신의 형태이다. 많은 소설이나 글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라는 이야기의 맥락이 바로 가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자신들이 도달할 수 없는, 자신들의 세계와는 유리된 세계에서 비롯했다고 하는 원칙들을 통해 자신들의 체계의 일관성을 부여했으며, 이것이 바로 이데아이며, 신이며, 옥황상제이며, 하느님의 모습인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들의 세계를 규칙적으로, 혹은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러한 체계에 규칙성을 부여하는 원인을 자신들의 체계 외부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계 외부에서 비롯한 원칙들은 인간 세계에서는 그러한 원칙의 참됨을 증명할 수 없으며, 그러한 규칙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딱히 그러한 원칙들을 정당화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그러한 규칙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한 원칙에 대한 의문과 문제제기가 계속 되어왔으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체계 내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불과 백여년 전에 증명되었다.

여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즉, 자신들의 체계에 대한 규칙성을 자신들이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다. 즉, 체계 내부에서 체계를 지배하는 또 다른 원칙들을 생산하며 폐기하는 체계라는 것이다. 굳이 압축적으로 표현 하자면 자가발전적 체계 - self-generating system - 라는 것인데, 이러한 원칙들의 생산과 폐기를 통해 인간 사회가 발전해나왔음을 역사적인 예를 들어 이야기하는 것은 독자의 시간과 정력을 빼았는 동시에 본문의 진행속도에 지대한 저해를 가할 것이므로 양해를 구하고 넘어가겠다. 그런데, 이러한 자가발전적 체계를 설명하는 또다른 이름의 이론이 있는데, 이는 독자 모두가 이미 기대하고 있었듯이 진화론이다. 말하자면 인간 스스로가 체계를 지배하는 원칙을 제기하고 수립하는 과정이 하나의 진화적 단계를 거치며, 그러한 체계 자체가 생물의 진화적 적응과 같은 양태의 단계를 거치며 변화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두 번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겠다. 인격적 일신론이 (근)현대의 사회와 과연 합치할 수 있는 상위 체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들을 생각해보자. 이에 대한 답변은 부분적 긍정과 부분적 부정을 담고 있다. 부분적 긍정은 역사적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이에 대해서 체계 내부에서 참/거짓을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원칙을 - 아직은 - 제공 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의 긍정이며, 부분적 부정은 인간이 체계와 상위 체계의 논리적 관계를 표면적으로 인지한 상태에서 인격신론이 과연 상위 체계의 전근대적 형태에 불과하였음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에서의 부정이다.

인간이 역사를 거치며 많은 체계들을 설립/수정/폐기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체계 안에서 살아남아온 상위체계적 원칙들이 존재한다. 이를 테면, 살인 - 혹은 생명을 해하는 일 - 은 옳지 못한 일이다 라는 것 같은 원칙이다. 말하자면, 선과 악이라는 원초적인 행동 양식에 대한 대원칙이 필요한데, 이러한 대원칙의 근거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그냥,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는, 혹은 하면 안될 것 같다는 막연한 원칙이나 '양심'에 의해서 제어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를 법률적 은어로는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형태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인격신에 근거한 신앙 체계는 자신의 양심과 대칭적인 인격을 가지면서도 전지적 시점을 가진 인격신의 관찰을 전제로 하고 하므로 이러한 제어에 대한 효과적인 자기합리화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원칙들이 체계 내부에서 근거를 찾기는 힘든 것들이지만 체계 자체를 무모순적 체계로 작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원칙들이며, 그러한 원칙의 작동에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바라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체계의 작동에 필요한 원칙의 효율을 더해주는 효소라고 해서, 그것들이 부수적으로 포함하는 폐기되어야 마땅한 전근대적 원칙들을 아직도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비합치성을 제기하는 첫 번째 질문이 될 수 있겠다. 즉, 인격신론적 신앙관 자체가 하나의 패키지로 묶이면서 그 안에 과거의 사회에서 포함되었던 원칙들이 동시에 전승되어 왔는데, 그 중에서는 아직 쓸모가 있는 것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유용성에 의심을 하게 되는 원칙들이 포람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의 구약 성서에서 주장하는 배척적인 일신론인데, 다른 신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신이나 민족에 대한 철저한 배척을 지시한다. 신약에서 이러한 배제가 완화되긴 하지만 여전히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독단적인 체계의 완비성에 대한 주장은 체계가 가진 (상위 체계적) 원칙들을 설립/수정/폐기하는 과정에서 방해적 요소가 될 수 있다. 즉, 진화의 원칙 자체를 부정하는 진화 내부의 원칙이 존재하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괴델의 발견이 알려진 지 불과 백여년이 지난 이후 이러한 인격론적 신앙관이 일개 시정잡배의 블로그에서 그 논리적 위치에 대한 공박을 당하고 있는 마당에,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인격론적 신앙관이 상위 체계의 역사적 종류에 불과했음을 인정하지 않고 독보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15-6세기 당시에는 전문 지식인만이 알던 케플러의 원칙을 통해 지동설이 주장되고 알려졌지만, 지금에 와서는 중학교 과학교과서에 그러한 내용이 설명되어 상식으로 인지되고 있는 것처럼, 현재는 일부만이 인격론적 신앙관의 논리적 위치에 대해 논박하고 있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에도 현재와 같은 위치를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격론적 신앙관은 인간의 인식 체계의 진화 과정에서 거쳐가고 있는 단계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나 논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인격론적 신앙관 자체가 인간의 인식 체계를 조직화하는 상위 체계적 특성들에 적합한 특성을 지녔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위 체계적 적합성이 신의 존재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의 인식 체계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를 조직화 하는 상위체계로서의 논리적 역할과 그러한 역할이 진화 과정의 일부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된 (근)현대의 인식 체계에서는 일부 인격론적 신앙관이 주장하는 전근대적 원칙들이 반드시 폐기되어야 할 확실한 근거가 존재한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추신 : 최근 들어 글이 일정한 형태를 지니며 고착화 된다는 생각도 하게되고, 지나치게 현학적인 논의를 계속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된다. 어느 것이든 좋지는 않은 경향이건만 이를 개인 블로그라고 해서 그냥 두어야 할지, 혹은 적어도 표면적이나마 문체에서라도 변화 - 차마 개선이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고로 - 를 시도해야 할 지 모르겠다.
2012/02/06 15:07 2012/02/0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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