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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전망

Ceteris Paribus 2012/01/31 07:06
요즘 신문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근대 국가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근대 국가가 폭력을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위가 된 상황에서 계속되는 (거대) 국가의 정책실패가 과연 국가가 권력을 이양받을만한 유일한 그 이유를 정당화시켜주는가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더 쉽게 말하자면, 개인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비효율성과 질서 유지라는 이득 사이에서의 비용-이득의 가늠을 해 볼만한 시간이 되었다는 이야기이지.

특히나 근대 국가가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정책과 행동을 마치 잘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실제로 구성원들이 느끼는 국가 정책에 대한 거리감과 실제 접근 가능한 거리간의 괴리를 위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국민들은 자신들의 투표행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투표행위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그렇게 크지 않다.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출이지, 그 대표자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대표자를 선출한 것보다 더 많은 행위가 필요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하위 대표자들의 동의마저 필요하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가 관료적 정당 체계에 기반을 두고있음에서 비롯하는 체계적인 비효율이며 적어도 현재의 관료적 정당체계가 파괴되지 않는 한은 근본적으로 수정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사람이 모든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필요한 정보를 얼마든지 양방향으로 전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정보화시대에 과거의 일방향적 관료적 정당체계에 기반한 정치 체계를 굳이 지지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1. 근대 민주주의가 가지는 비효율성이 현재의 '위기상황'의 근본 원인이다.
2. 기술적 기반이 확보된 현재에 이러한 근대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을 수정할 가설을 세워보자.

다소 뜬금없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한다.
먼저 왜 근대 민주주의가 가지는 비효율성이 현재의 '위기 상황'의 근본 원인인가? 이는 일전에 본인이 쓴 글 - 거시 호구의 거시 - 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즉, 미래 상황을 합리적으로 대비하지 않고 빚잔치를 벌인 정부/정권들의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원인은 근대 민주주의 정권이 독재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제정된 단임제 - 혹은 연임제 - 정권들 사이의 정권 교환이 정책의 일관성을 가져오지 못한 것에 있다. 대부분의 근대 정당 민주주의는 선출 관료와 이들에 의해 지명되는 임명 관료들에 의해 정권이 유지된다. 이들 임명 관료들은 정권 유지를 위한 정당성이 확보되는 유일한 수단, 선거에 이기기 위한 득표 집단을 동원한다. 이를 정당 머신(machine)이라고 베버는 표현하였는데 말하자면 국회의원 - 보좌관 - 지구당의 형태로 유지되는 전형적인 정당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당 머신이 생계로서의 관료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유지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투표자들에게 접근 가능한 정보를 왜곡시키고 동원을 통해 반대 의견을 무력화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국민들에게는 채권의 발행을 통해 국민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주고 물가를 내려 생계를 안정시켜주겠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것이 자신들의 자녀 세대에게 빚을 지우고 자신들의 생계를 일시적으로 도모하게 하려는 수단임은 묻지 않는 것이다. 오직 보이는 것은 일자리와 물가, 이 두 가지 프로파간다일뿐. 이러한 왜곡과 정권 유지는 지역구 시의원 선거부터 대통형 선거까지 관료제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동일한 형태의 복제를 거쳐 실현된다. 말하자면 동일한 맥락의 왜곡이 좁은 지역 선거에서 넓은 지역의 선거까지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료제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이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수단은 현재의 관료제 민주주의에 기반하는 가장 폭력적인 기구인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다. 유사 이래로 근대 민주주의 국가만큼 체계적이며 폭력적인 압박을 개인의 행동에 가하며 이를 정당화하는 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전근대/중세의 국가가 봉건적인 특성을 지녔다고 하지만 현재처럼 모든 인간의 행동에 대한 체계화된 규정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임의적 판단이 판을 치던 시대였지만, 현재의 대법원이나 청와대라고 그렇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판단은 결정권자의 임의적 판단에 의존한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헌법이나 성문법은 엿이나 먹으라지. 여간. 이러한 거대한 기구가 소수의 임의적 판단에 의해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 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지게 되고, 실패의 여파도 크게 미친다. 즉, 정책결정을 하면서 판단해야 할 조건들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 feasible한 - 정책의 수단이 적어지고,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계속 튀어나오게 되면서 정책의 목표가 흐트러지거나 그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실패할 경우, 넓은 지역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여파가 미치기때문에 실패의 위험성도 커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말이지.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은 독일식 정당명부제고 나발이고 체계적인 비효율은 계속된다. 오히려 정당명부제는 중앙당에서 비례선출된 대표권한을 분배하는 식이므로 이러한 관료적 비효율성이 심화될 가능성을 상당히 내포하고 있다. 석패율제는. 훗, 그따위 개소리를 가지고 나불대는 것들은 학부에 가서 정치학 입문부터 다시 배우고 오라고 해라. 여태껏 근대국가가 관료적 민주주의를 유지한 것은 이러한 제도가 광역화된 지역에서 모인 자원을 집중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제도였기 때문에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사책을 펴서 보면, 유럽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많은 자원과 실패의 위험이 동반된 일종의 모험사업이었고, 이를 위해 자원의 집중과 실패의 손실을 분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가 발전이 늦게 시작되었네 하는 이유를 이탈리아 반도의 영방국가화와 묶어서 설명하는 이유가 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이런 중앙집권화의 열매와 이면의 독을 다 보았을때, 이제는 열매는 다 맛보았고 서서히 독이 온 몸으로 퍼지기 시작한 단계가 된 것이다.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경제학 이론에서 설명하는 성장곡선은 항상 오목한 - concave한 -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성장 초기단계에는 높은 성장률을 보이지만 성장이 진행될 수록 서서히 성장률이 낮아진다는 경험적 가정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현재의 중앙집권화의 비효율성에서 초래되는 손실과 성장의 이득이 반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낮은 수준의 폭력성을 지닌 영방국가/연합국가의 형태로의 해체수순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스위스의 칸톤 시스템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문제는 현재의 국가들이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기준으로 설계되면서 발전되어왔기 때문에 많은 생산 수단들이 일정 지역 - 예를 들자면 서울 - 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균형발전과 생산 수단의 지방 이전이 그 과도적 형태에서 필요한 정책이다. 현재의 빠른 정보화 기술이 사실상의 직접 민주주의를 일정한 범위 내에서 - 시, 군, 더하면 도까지 -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생산 수단이 확보된 상태에서 각 지역 정권들이 유연한 정책결정을 통해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하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전을 통해 중앙집권화된 근대 국가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고 현대 국가로서 자연스럽고 빠르게 이전하는 국가가 지속적이며 높은 성장 및 복지를 추구하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꼬리 1. 누구처럼 전국의 하천 운하를 수도권으로 연결해서 하나의 일률적인 운하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하시는 분은 이러한 흐름과는 정반대로 가시는 분이지. 그나저나, 이제 그것들은 다 어떡하지. 복구하는데도 돈이 엄청 깨진다는데.
꼬리 2. 그렇지 않다면 운하 지하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거나 이멀젼(참조:gears of war)을 발견하면 모르지.흠.
2012/01/31 07:06 2012/01/3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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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 호구의 거시

Ceteris Paribus 2012/01/28 05:02
[본 글은 본인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거시경제에 대한 사견을 담고 있으며 학계 주류의 일반적인 상식이나 이론적 근거를 포함하는 글이 아닙니다. 참고로 전 거시는 '전혀' 모릅니다]

그래, 그놈의 글로벌 위기, 글로벌 경제. 하도 짖어대다보니 뭐가 문제인지, 뭐가 문제가 아닌지도 분간하기가 힘들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이리 우왕좌왕하면서 말들만 많고 성과는 보이지 않는건가. 나오고 있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국가 내 세대간 자원 분배의 격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2. 지역 간 성장 속도의 격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청년 실업과 관련된 레파토리들은 첫 번째 주제에 속한 이야기일 것이고, 유럽발 -이게 정말 유럽발이냐?- 금융위기에 관한 레파토리들은 두 번째 주제에 속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이 두 가지 문제가 같은 원인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그 원인은 바로 myopic time-inconsistency. 굳이 한글로 바꿔 말하자면 근시안적 동태 비일관성이랄까. 한글로 바꿔 말하니 무슨 말인지 더 모르겠다. 여간 요지는 국가나 지역 정부같은 정책 결정자들이 지속적으로 근시안적 정책을 사용했는데, 이런 정책이 시간이 변하면서 말을 바꿀 소지가 있는 문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한국적 은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카드깡'. 나중에 갚기로 하고 돈을 빌려서 쓰고 아들한테도 이런 상황을 권했는데 - 이 쯤에서 오래된 모 카드사의 "아버지는 말하셨지 그걸 가져라" 라는CM이 권떠오르는 건 왜일까 -  막상 아들이 그 카드를 물려받고 보니까 계좌엔 빚만 잔뜩 있고 담보를 할만한 자산이 전혀 없는 상황인거지. 아버지 딴에서는 새로운 자산이 생기겠거니 하고 본인이 물려받은 재산을 죄다 담보잡혔는데 말이지.

비유로 돌아가보지 말고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렇다. 주제를 뒤바꿔 두 번째 이야기, 지역간 성장 속도의 격차부터 풀어보자.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이 과거 번영을 얻게 된 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제국주의 시절의 무한에 가까웠던 무료 자원과 낮은 시장 경쟁(혹은 넓은 시장)에 기인했다. 식민지에서 오는 새로운 자원들과 그러한 자원들의 활용이 높은 생산성의 증가를 가능하게 했고, 상대적으로 덜 발전된 넓은 해외 시장이 그러한 (과잉) 생산을 흡수해주었다. 그러한 생산의 이익이 국내로 흘러들어와 자본이 축적되었고 이렇게 축적된 자본을 통해 새로운 인적자원과 기술개발의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높은 성장세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은 장기채권의 발행을 통해 생산 이상의 자원을 소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문제는 정해진 시장 크기와 자원의 양 안에서 국가들간의 제로섬 게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제로섬 게임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말하자면 각 식민지가 명목상의 독립과 자치권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이런 명목상의 독립이 그동안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축적되는 자본을 충분히 쌓아서 후에 돌아올 빚을 갚을 만한 자산을 만들어 놓았어야 했는데, 그 자산을 만들기 위한 한 축이었던 자원 풀이 국가간 경쟁으로 인해 충분히 가용할만큼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원을 가진 기존의 식민지들은 이런 자본을 토대로 선진국의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했고, 안그래도 좁은 시장에 강한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숟가락을 들이밀게 되었던 것이고. 게다가 기존 시장이었던 과거 식민국가들이 자체 기술을 개발하면서 국가주도의 내수 보호전략을 통해 국내 시장에서의 기존 선진국의 점유율을 낮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좁아진 시장, 비싸고 희귀해진 자원, 게다가 축적된 자본을 흡수할 수 없이 충분히 비대해진 투자 시장이 현재의 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선개발국가들의 빚이 기본적으로는 장기적인 성장이 가능하기때문에 지금 빚을 지더라도 나중에 갚을 수 있으리라는 신용에서 나온 것인데, 그러한 신용이 비관적인 성장세로 낮아지게 되자 또다른 빚을 져서 갚았어야 할, 만기가 다 된 과거에 진 빚들이 몰려오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돌아온 빚을 계속 채권을 발행해서 -이를 양적 완화라는 은어로 표현하는데- 갚는다고 해봤자 앞으로 돌아올 빚을 계속 이렇게 갚을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러한 빚이 장기적인 성장의 지속의 가능성을 반영하는 시장의 '신용'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만큼의 성장이 실현되지 않는 한 누군가가 돈을 빌려줄 이유는 없다는 것이지. 결과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획기적으로 바꿀만한 계기가 없지 않는한 지금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신흥시장들은 낮은 가격의 자원들을 이용해 선진기술을 빠르게 흡수하며 기존의 시장에 숟가락을 내밀게 되는데 선개발국가들의 전철을 보았기 때문에 빚을 지며 내수를 부양하기보다는 흑자경영을 통해 자본 축적과 미래에 가용한 자원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강력한 전제적 국가 경영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국위선양'이나 국가적 목표같은 주제를 통해 국내 정서를 진정시킨다는 것은 이제는 아침드라마의 플롯 만큼이나 진부한 이야기이다.

그럼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이는 세대간에서도 기성 세대가 누린 번영이 후속 세대의 빚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실현된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어떤 면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부모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사는 것은 실은 자신들의 부가 부모세대에 이미 실현된 것이므로 자신들의 부를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신이 누려야 할 부가 이미 부모의 부 안에 있는 것이므로 '정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결국 회사에 가서 월급을 타오나 부모 월급에서 용돈을 받으나 전 세대간 부의 양은 정해져 있으므로 그게 그거라는. 말하자면, 집에 취직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까. (먼산)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이러한 경제위기를 개척해 나아갈 방법은, 혹자는 미쳤나고 하겠지만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해저(양)개발. 선개발국가의 압도적인 기술력 - 이 해양개발이라는게 정말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인데다 대부분이 군수산업과 연관되어서 기술유출도 쉽지 않다 - 을 통해서 해저도시(!)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넘쳐나는 토건족과 공대생들, 그리고 부족한 주택문제와 자본축적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게다가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환경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퍽) 두 번째로는 우주 개발(;;). 이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딴지일보의 모 특집기사를 읽어보면 달이 데스스타의 외피라는 설이 있기 때문에 의외로 개발이 쉽지 않을지도.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우리는 달의 현 거주민 대표와 달 외피개발에 대한 MOU를 먼저 체결해야 하는데.....
2012/01/28 05:02 2012/01/2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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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umer theory를 위한 변명?

Ceteris Paribus 2011/11/22 12:25
 Dilbert.com

글쓴이의 전공에도 불구하고 경제에 대한 글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눈을 씻고 찾아 볼래도 찾을 수 없었던 이 공간. 굳이 변명을 하자면 뭘 모르던 소시적에는 아는 게 하나만 생겨도 신나게 글을 올려제끼고 본인의 무지를 방패(?)삼아 글이 내포한 심각한 위험성을 그냥 넘어가곤 했는데, 이젠 좀 더 아는게 생기니까 쉽게 어떤 상황에 대한 주장을 하지 못하게 되었더라 정도로 변명할 수 있겠다. 어쨌든, 간만에 본인의 전공에 대한 재미없는 이야기를 또 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consumer theory라고 한다면 많은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경제 교과서를 펴면 등장하는 수요-공급의 관계를 규명하는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전형적인 경제학의 영역을 다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 학부생때 지도교수께서 경제학은 수요-공급으로 시작해서 수요-공급으로 끝난다고 하셨는데, 어찌보면 간단해 보이는 이 관계 안에 상당히 다양하고 복잡한 주제들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교수님의 말씀에 부분적인 동의를 보내본다. 사실 수요-공급이라는 것은 소비자가 생각하는 적정 가격과 그에 따른 개인의 수요, 그리고 이를 전체적으로 총합(aggregation)한 총수요를 예측하고, 공급자도 비슷한 형태로 총공급을 예측하여 그 접점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시장청산(market clearing)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각 소비자와 공급자가 서로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이를 토대로 서로의 수요와 공급을 예측하여 적정 가격을 제시하는 일종의 경매상황과도 유사한 상황이 동반되는데, 이러한 부분은 학부생 및 고시생들이 배우는 기초 경제학 시간에는 거의 생략된 부분이다. 즉, 기본적으로 소비자와 공급자가 동등한 정보와 위치를 가지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는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인 정보 - 소비자는 공급자의 생산비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공급자는 소비자의 수요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며 - 에서 비롯한 비대칭적인 상황 - 공급자가 (대체적으로) 우월한 상황에서 시장 가격을 결정한다 - 을 우리가 바라보고 있기에, 이러한 밑도 끝도 없이 생략된 가정에서 비롯한 이론이 많은 경제학 입문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경제학 입문자들이 아담 스미스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니)

게다가 한국의 상황은 미국의 상황보다 더욱 비대칭적인 상황인데, 이는 핸드폰 시장 하나만을 봐도 알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애플의 아이폰을 볼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애플의 가장 큰 장점은 fancy한 디자인도 아니요, 하이엔드급의 기기 성능도 아닌, 소비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마치 잘 작동하는 것 같이 소비자에게 보여주는 소프트웨어의 부드러움에 있다. (software니까 soft하지. 이건 무슨 말장난인가 싶다.) 말하자면 소비자가 원하는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고, 그에 대한 willingness to pay를 예측한 가격 산정을 통해 시장에서의 위치를 점한다. 그리고 제품군의 다양성을 최소화해서 제품군의 가격차별화를 확실하게 하고. 물론 독점적 지위와 관련해서 말이 많기는 하다만, 일단 그런 것은 제쳐두고서 볼때 경제학에서 보는 공급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한국 기업인 삼성은 일단 생산자 위주(만)의 생산을 한다. 즉, 하드웨어의 성능향상과 (상당한 부분이 인건비 착취에서 비롯되는) 비용 최소화가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니, 소비자가 컨수머 리포트 필진도 아니고 cpu성능의 차이를 얼마나 체감하겠냐고. 오히려 하이엔드 부품 달아놓고 무겁고 비싼데다가 소프트웨어 이식이 낮아서 기기성능의 반도 제대로 체현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삼성 핸드폰보다는 실제 성능이 느리던 빠르던 더 부드럽게 움직여주는 애플 아이폰이 더 '빠른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지. 그걸 캐치하지 못하고 광고 내내 애플보다 기기성능 상으로는 훨씬 좋다고 선전해봐야 그게 얼마나 먹히겠냐는 거다. 생산자가 해야하는 역할 중에 소비자의 수요를 정확하게 예측해야 하는 역할이 동반되야 시장 청산과 균형가격이 나타나는데, 그걸 못하니 계속 과공급이 생기고, 그런 과공급을 인건비 및 요소가격(하도급 부품가격) 착취로 메꾸려고 하는 상황이니 이건 뭐 멍청한 상사 덕에 부하들만 쥐어 터지는 꼴이라.

이건 뭐, 한국기업과 미국기업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 보다는, 기초적인 이론이 얼마나 강력하고 정확한 실제 경제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예시인거라. 말하자면 이 글은 많은 경제학에 입문하는 초년병들이 기초이론을 등한시하고 간단하게 설정된 ceteris paribus라는 '가정' 안에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이런 저런 상황 설명을 해주려고 쓴 일종의 변호문인 셈이다.
2011/11/22 12:25 2011/11/22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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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치를 기억하다

손가락 2011/11/03 11:41
 한미FTA라는 것이 그동안 상당히 두루뭉술하게 설명이 되어왔다. 본질적인 잘못은 노무현 정부가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않은 채로 진행을 시킨 데에서 시작하겠지만, 더 큰 잘못은 현 정부가 (노무현 정부당시에도 논쟁 중이던) FTA의 몇몇 독소조항을 미국의 요구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치적용 성과를 위해 빠른 비준을 국회에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는 어떤 면에서 현 정부의 소위 말하는 자원외교와 맥락을 같이하는 대표적인 망국의 시책 중에 하나인데, 자원외교가 단순히 세금을 해외에 헛뿌리는 단순한 '남 좋은일'의 분류에 속한다면, 이는 단순한 남 좋은 일을 뛰어넘어 내가 '피 보는' 정책에 속한다면 면에서 망국의 치세로는 더 높은 순위에 속한다고 하겠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망국의 치세의 최고봉은 누가 뭐래도 4대강이요.)

 이야기가 잠시 산으로 가고 있는데 한미FTA는 지금의 상태로 체결된다면 심각한 무역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한미FTA가 미국 정부 내에서는 연방 권고수준으로 취급되는 반면 (미국은 각 주 정부가 대부분의 주 행정에 대한 집행권을 가진다. 연방 법원 및 군사(안보)동원에 관한 특수사항이 아닌 이상 연방 정부가 주정부의 행정권한을 침범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국에 대해서는 강제성을 동원하는 사항이 많기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형평성을 조절하지 않는 한 SOFA협정 이후 최악의 협정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높은 비교우위에 의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가 수준의 문제가 아닌, 국내 정책에 대한 자주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즉, 미국이 한국 정부의 국내 정책에 대하여 FTA를 빌미로 간섭권을 사실상 갖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최혜국 대우라는, 고등학교 국사에서 강화도 조약에서 왜 강화도 조약이 불평등 조약인가를 설명할 때 맨 첫 단락에 나오는 사항을 버젓이 위치시키고는 불평등 조약이 아니라며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은 도대체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국민 대다수를 상식 이하의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인지. 이젠 FTA 체결하겠다고 국사교과서까지 수정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이 상황의 국회 비준을 앞두고 국회에서의 행태는 상당히 지리멸렬을 넘어서 분노를 동반하게 한다. 먼저 집권여당은 대다수가 골수까지 친미인 자들이므로 할 말이 없다지만 본인들이 한국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살고 싶다면 본인들의 기득권에 대한 '자주와 독립'마저 포기하고 싶은 자들은 기꺼이 그리하도록. 야권 제1당은 무리짓기도 못하고 타이밍을 잡는 것도 최악이지만, 이번에도 날치기를 당한다면 (뭐, 집권여당이 국회비준을 원한다면 100%겠지) 다음 선거에 대한 가망인 접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무려 기호 10번인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보고 당신들은 뭘 느낀게 없나? 기호 2번의 힘이 사실은 별거 아니라고. 1번도 씹어먹어 버렸는데 2번은 멀쩡할 줄 아나? 어디서 깃발부대 코스프레질인지. 국민들에게 제1 야당으로 인정을 받고 싶다면 국회의사당 회의장 문에 철심을 박아서라도 막아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생활하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나 조차도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비록 내가 여기서 직장을 다니고 대부분의 삶을 여기에서 보낼 것이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지만, 사람의 인지상정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그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잊고 사는 걸까?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주와 독립' - 비록 불완전 할지라도 - 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2011/11/03 11:41 2011/11/0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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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러운 짐작

손가락 2011/10/27 10:30
 이번 보궐선거를 보고 짐작해보건데 현임 대통령은 고도의 임기 후 보신정책을 쓰고 있는 듯 하다. 일단 최근에 눈에 보이는 여러가지 행태들이 곧 임기를 마칠 대통령의 일반적인 행태라고 보여지지 않을 정도로 반 여당적이다. 심지어는 대통령이 여당의 대권 유지를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잠깐, 대통령이 현 여당의 대권 유지를 바라지 않는다고? 그것 참 말 되는 일이 아닌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짐작이 가능한지 짚어보자.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성향은 극도의 보신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기때문에 여당과 야당이라는 틀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자기 세력에 대한 동조의식이나 동료애가 없을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의 보신과 관련해서 여당과 야당의 구분이 전혀 없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보신의 의미에서 누가 자신의 보신에 더 나은 세력일지를 생각해보자. 일단 여당이 집권할 경우 현재로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후보는 자신에게 매우 혹독한 처벌을 내릴 수 있다.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은 자신들이 전임 대통령과 얽혀있다는 오해(?)를 풀고, 꼬리를 밟힐만한 물적, 인적 증거들을 말소하겠다는 의도가 클테니까. 그리고 내부사정을 더 잘 아는 만큼 티 나지 않으면서도 치명적인 처벌이 가능할 것이고. 명분상 일단 여당 내에서 후발 집권세력이 같은 여당의 전임 집권세력을 처벌하는 경우이므로 같은 여당 내에서 처벌을 반대하기가 어렵다. 또한 같은 여당 내에서의 처벌이므로 '역사와 정의'를 바로잡는다는 매우 훌륭한 명분을 내세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야당 또한 그러한 혹독한 처벌에 대해 가타부타 할만한 여지가 없다. 오히려 (멍청하게)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면 좋아했지.

 그런데 야당이 대권을 잡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일단 처벌이 들어올 경우 여당 내부에서 임기 후의 보복성 처벌이라는 형태로 야당의 처벌에 대해 반발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말하자면 실드를 쳐 줄거란 거지) 게다가 여당 내부에 얽히고 섥힌 인사들도 대통령의 처벌과 관련에 연쇄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자신들에게도 피해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그 처벌의 강도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말이지.

 이런 두 가지의 가능한 처벌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본다면 여당에서 집권을 하는 것보다는 야당에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본인에게 닥칠 처벌의 강도를 놓고 생각해 볼 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오히려 현 여당이 다음 대선에서 대권을 잡지 못하도록 반 여당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본인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가 아닐까 생각해보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신의 수준을 넘어선, 초인적인 형태의 개인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그렇다면 조금 재미있는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봐야지.

 어차피 이 상태에서 대권을 넘겨받는다면 일단 현재 집권 여당에 대한 처벌은 국민 정서와 더불어 상당한 명분을 얻게된다. 물론 대통령에 대한 처벌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 나라면, 내가 집권을 한다면 이런 정서를 이용해 그동안 여당이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하는데 필요했던 여러 도구들(사법기관장 임면 및 대검 중수부 이용, 국가보안법 등)을 철저하게 도려내겠다. 물론 야당이 쓸 수 없다는 생각도 들겠지. 하지만 본인들이 여태까지 때리는 쪽보다는 맞는 쪽에 더 가까웠다는 점에서 쓸만한 (그리고 상당히 잔인한) 몽둥이를 하나 없애버리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정의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고. 그리고 부동산 및 금융관계 호적정리를 좀 해야겠지. 그 동안 집권 여당의 마르지 않는 샘이던 차명 부동산과 불법 대출을 깨끗이 정리해주는 것 역시 수순이지. 먼저 사법부 독립이 된다면 두 번째 과업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리라 본다. 뭐,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시나리오 아닐까. 그 과정에서 현임 대통령의 치부들도 자연스럽게 다시 밝혀지리라 보고. 뭐, 말하자면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고 '중립적인' 처벌을 할 환경을 만드는 게 야당 집권 후 가장 확실한 처벌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2011/10/27 10:30 2011/10/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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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the tide.

손가락 2011/10/22 14:14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의 정치시국을 보고 있노라면 말이다. 의도했던,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하나의 잣대를 가지게 되었고, 그야말로 '홈런맞은 투수처럼'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끌려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말이다.

나는 사실 정치판에서 누가 정의인가를 정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있는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기본적으로 정치라는게 특정 이익집단의 이익추구 활동이 충돌하는 상황이므로 누군가의 이익이 누군가에게는 필연적 불이익이 될 것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그 이익추구 활동이 정해진 룰대로 행해지는가라는 것이 굳이 정의(justice)를 정의(define)한다면 그 기준에 좀 더 부합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정해진 룰이 또 얼마나 모두가 반대하지 않고 수긍할 수 있는가도 그 기준에 포함한다면 더 좋을 것이고.

여간 사설을 빼고, 이번에는 좀 더 해볼만한 게임인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트위터니 팟캐스트니 하는 것들은 전혀 모르시는 영감님들이 팔각모를 쓰고 탑골 공원과 시청 앞 광장을 헤메시는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광장에서 웃고 떠들고 조롱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다소 그로테스크한 대비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굳이 열광할 이유도, 그렇다고 그들을 비꼬면서 광장 밖으로 스스로를 퇴장시킬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도 광장을 지나가는 행인1로 그 광경을 보면서 슬며시 웃음을 짓게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웃음이 치부가 드러난 영감님들의 추잡한 '꼼꼼함'에 대한 비웃음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소금물을 먹고 정신차린 '전직 좀비'들이 좀 더 늘어난 데에서 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여간 메인스트림이 아니었던 잉여 4인방이 한 의외의 정치판 벤쳐사업은 상당히 성공한 듯 하다. 물론 그들 스스로도 메인스트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좀 더 킹메이커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여간 그것만으로도 좋다. 불쏘시개가 필요했으니까, 불쏘시개를 자처한 사람들의 역할은 유쾌하게 흘러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문제는 이러한 감시가 '언더그라운드'가 아닌 '메인스트림'을 통해서 앞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봐야한다. 결국, 합법과 비법-불법이라고는 못하겠다-의 회색지대에서 행하는 정치행위는 대세를 바꾸기에는 그 한계가 있다. 설사, 한번의 광풍으로 일시적인 흐름을 바꾼다고 해도, 그것을 정당성을 갖춘 기구로 합법화하지 않는한은 다시 그 역풍을 맞을 수 밖에 없음을 지난 5년동안 겪지않았나. 게다가 그 역풍은 그 전보다도 지독하고도 매섭게 불어닥쳤다는 것도 알고 있고.

내가 수능을 준비할 당시에 이런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넌 수능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수능 이후의 면접과 논술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네가 수능에서 일정한 점수를 받는 것은 대박, 혹은 쪽박의 복권놀이가 아니라 정해진 수순에 불과하다고. 네가 생각한대로 일정한 점수를 받고, 면접과 논술까지 완전히 준비할 때 네가 원하는 대학의 진학준비가 비로소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금의 대권놀이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대세의 흐름은 기울고 있다. 큰 흐름의 변화가 없는한 대권의 문제는 정해진 수순으로 흘러갈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이지. 한 번 실패해 보았으니 이젠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 지의 우선순위와 해결방안을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불과 1년이다. 준비하고 생각한 시간이 불과 1년여 밖에 남지 않았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도 알 지 못하는 무력한 이론가들은 그들끼리의 순위싸움을 하도록 두고, 더 큰 흐름을 바로잡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켜야 할 때이다. 한 번의 실패와 상실로 이미 충분히 고통받지 않았나?
2011/10/22 14:14 2011/10/2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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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러니까

손가락 2011/09/14 13:20
 난 내가 훌륭한 학자가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요즘 느끼는 것은, 결국은 학자가 될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미숙함을 빚고, 많은 실망과 고통을 겪는 일이 많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별 일 없이 지나갔을 일들도 항상 문제가 되곤했지. 다만 내가 그런 결정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감정과 고통들을 글로 표현할 줄 아는 재주를 지녔기 때문인 것 같다. 어려서부터 그 흔한 비디오 게임기조차 없어 그저 하루 종일을 책을 보면서 소일 할 수 밖에 없었고 늙은 노인네들의 표현을 읽고 따라하다보니, 소위 말하는 '학교에서 먹히는' 글빨을 갖게 된 것 같다. 어려서 귀에 닳도록 들은 성경 덕분에 오만가지 비유에도 능란(?)하게 되었지. 그러다보니 성질을 낼 장소를 일기장과 원고지에서 찾게 되었고, 아둔한 동년배들을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엿먹이곤 했었다. 그리고 밖으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격변을 풀어놓을 곳을 글 위에서 찾게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덕분에 글쓰고, 읽는 일을 어렵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바로 이 블로그처럼 내 마음대로 글을 휘갈기고 휘두를 수 있는 공간까지 찾기에 이르렀지. 물론 읽는 이들에게는 다소간의 고역이 될 지 모르나.

 글, 글, 글. 결국 남는 것은 글과 생각들 뿐. 생각을 담아놓는 이 작은 그릇들 안에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숨어있을까. 지난 글들을 되돌아 읽어보며 그 순간들의 감정들을 다시금 느껴본다. 부끄러움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어찌하리. 지금 이런 글들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의 감정들도 결국에는 부끄러움이 될 걸 안다. 그래도 쓴다. 끄적끄적.

 생산적인 글쓰기란 무엇일까. 블로그 초기에는 기획성의 기사들도 많이 쓰고, 나름은 편집의 형식도 갖추려 노력해보았는데, 결국은 어느 순간엔가 반쯤은 일기장이 되어버렸다. 결국 개인 블로그라는게 그런거 아닌가? 내가 여기에 내가 전공하는 evolutionary game theory 내용을 쓸 수는 없잖아? 그럼, 이 블로그는 진짜 산으로 가게 된다고. 물론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허나 그 극소수의 대다수(90%이상)은 한글을 인식조차 못하는데 수고의 필요를 못느끼는 것도 당연지사.

 솔직히, 나는 지금 극도의 슬픔과 우울을 느끼고있다. 다만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글을 쓰면서 그것들을 추스리고 있을 뿐이지. 쏟아 놓을 것은 쏟아 놓아야지. 결국 넘치게 담은 물은 넘치게 마련이니까. 망할.
2011/09/14 13:20 2011/09/1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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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과 질문

손가락 2011/07/17 02:07

시험도 끝나고 모처럼만의 방학을 보내고 있다. 안그래도 뭔가 집에서 할 일이 없을까 빈둥대던 와중에 한국에서 가져온 DVD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나온지도 꽤 된 영화고 많이 알려진 영화라서 자세한 줄거리 및 영화 관련 제반사항은 생략. 영화에서의 메인 토픽은 인생의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다니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수퍼 컴퓨터 '심오한 생각 Deep Thought'가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적접 도출이 어렵다는 것을 안게지) 만든 샘플 셋이 지구라는 설정인데. 결국 이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1. 42
2. It is wrong question(Command)

See the truth


라는 컴퓨터스러운 답변을 내놓는다.
주인공들에게 부연설명 하는 바로는 결국, 정확한 인생의 궁극적 질문 따위는 없다. 그딴거 질문 찾고 답 찾고 할 바에야 차라리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하는데. 음. 이 영화를 매우 많이 본 나로서는 새삼스럽게 설득력을 갖는 이 대사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과연 '완벽'의 모습을 모르는 인간이 '완벽'을 구현할 수 있는가? 유한한 상황과 유한한 상상력만을 가진 인간이 무한한 상황과 변화에 대한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해답체계를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새삼스럽게 흘러나온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찌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과) 답을 찾으려 헤메느니 차라리 그 정력을 현재를 즐기는 데에 사용하면 적어도 너의 효용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이다.
의미없는 질문과 의미없는 답들의 연속이라. '수많은 (철)학자라고 하는 인물들의 행동이 뻘짓거리 일리 없어!'라는 억지는 집어 치울란다. 어차피 그건 답과는 무관한 전형적인 '권위에의 호소'니까. 그럼 뭐냐, 내가 하려고 하는 질문들과 그 답들이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인가를 생각해봐야지. 공부를 집어 치우고 딴 걸 한다고 내가 이만큼 행복해 질까? 적어도 나는 인간을 탐구하고 그것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에서 나의'행복'과 '의미'를 찾는 사람인데. 행복과 궁극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는 데에서 행복을 얻는다라. 상당히 모순적이고도 아이러니한 상황임에는 분명한데, 그것이 현실이다. 현실이 그러할 진데,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꿀 이유야 없지. 적어도 다른 방식의 수단이 생겨서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지 않는한.
 그럼 내가 하는 행동은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거야, 눈앞의 행복을 찾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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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7 02:07 2011/07/17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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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손가락 2011/06/21 09:14
세대 충돌로 오인되고 있는 작금의 계급 투쟁에 대한 첨언.

보이고자 함은
1)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쟁의 본질은 세대간 충돌이 아니라 노동 대중과 유산(불로소득)계층의 투쟁이다.
2) 현재의 '반값 등록금' 논쟁은 구체화된 계급 투쟁의 슬로건이다.
3) 계급 투쟁의 실제적 결과를 얻기 위해 현재 유산계급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물적 기반을 전복하여야 한다. (혹은 노동계급이 독자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의 확보가 필요하다)

1)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쟁의 본질은 세대간 충돌이 아니라 노동 대중과 유산(불로소득)계층의 투쟁이다.

  이는 매우 자명하다. 투쟁의 참여계층은 '등록금'을 부담할 수 없는 대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들이다. 즉, 일반적인 노동을 통해 고가의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지 못하는 가구의 구성원 전체가 투쟁과 연관된, 혹은 투쟁에 공감하는 (잠재적) 구성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현재의 등투는 학생부터 그 부모세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세대와 연관되어 있다. 또한 그들이 공통적으로 등록금을 부담할 만한 물적 기반이 부족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바, 현재의 투쟁은 유산 계급과 노동 계급 사이의 계층 투쟁이다.

2) 현재의 '반값 등록금' 논쟁은 최초의 구체화된 계급 투쟁의 슬로건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구체적인 계급 투쟁이 전면에 드러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최초의 사건이다. 그동안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투쟁 계층의 대다수가 무차별적 일반 대중, 혹은 대학생이라는 측면에서 그 투쟁의 주체가 경제적 기반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입장을 기반으로 한 투쟁이였다. 물론 정치적 기반과 경제적 기반이 매우 필연적인 연관이 있었지만, 그 대중이 갖는 경제적 기반의 이질성의 차이가 명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투쟁은 등록금의 지불이 가능한 계층과 불가능한 계층 - 그리고 이는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을 나누는 경계선과 일치한다 - 이라는 명확한 경제적 차이를 경계선으로 계급을 차이짓는다. 그러한 측에서 볼 때, 현재의 논쟁은 한국 정치사상 가장 최초로 등장한 (경제적/유물적) 계층 구분을 시도하였으며, '반값 등록금'은 이러한 무산 계급의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대한 정정 요구를 담는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구체화된 계급투쟁의 슬로건이라 할 만 하다.

3) 계급 투쟁의 실제적 결과를 얻기 위해 현재 유산계급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물적 기반을 전복하여야 한다. (혹은 노동계급이 독자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의 확보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한국에서 왜 '벤쳐'와 '청년 창업'이 불가능한가에 대한 답을 명확히 얻을 수 있다. 즉, 유산 계급은 무산(노동) 계급이 자신들의 유물적 기반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생산 능력을 갖추기를 원하지 않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는 법적,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통하여 이러한 '새로운' 생산 수단의 창조를 방해하는 것이다. 혹은 이들이 만든 새로운 생산 수단을 독립화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물적 기반 안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역시 매우 자명하다. 이러한 유산 계급의 가장 정당화된 무기인 법적, 정치적 정당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이는 '투표'와 '선거'를 통해 법적,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유권해석을 할 결정권자인 대의원, 혹은 대통령의 선출을 통하여 가능하다. 법적, 정치적 강제성을 통하여 유산 계급의 기득권을 약화시키고 정당하게 그들의 물적 기반 위에서 벗어난 독립된 생산수단을 가짐으로서 무산 계급은 중산 계급이 될 수 있으며, 대중적 연합을 통해 이러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3줄 요약
1) 현재의 투쟁은 무산-유산 계급간의 계급 투쟁이다.
2) 유산 계급은 그들이 지배한 언론을 통해 이를 세대간 충돌로 호도하려 한다.
3) 무산 계급은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고 이를 투표권 행사에 반영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소위 말하는 '진보 진영'은 정치적 최저점에서 연대의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즉, 유산 계급의 불공정한 기득권 점유의 타파를 위한 정치적, 법적 정당성의 획득을 연대의 기초로 봐야한다. 적어도 유산계급의 기득권을 분배하는 데에서 일말의 이득이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어떤 결과가 나오든 Pareto Improvement가 가능하다는 말씀)
2011/06/21 09:14 2011/06/2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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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is the love?

Ceteris Paribus 2011/04/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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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오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며>

 최근 거시경제학 공부에 집중하면서 성장의 문제가 가장 첨예하며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주제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것인가? 그러나 이 성장의 문제는 소비를 통한 복지의 평활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우회로서의 방법론이지 궁극적으로 복지와 행복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든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성장의 문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어떻게하면 달을 정확하게 가리키게 할 것인가를 문제로 삼는 것이지 달 자체에 대한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달 자체를 탐구하기가 매우 애매하고 어려운 문제라 지침으로서의 의미가 있던 것이지. 그렇다면 그 손가락이 가장 좋은 지침인가? 나는 그렇지않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다른 지침들도 지금에 와서는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행복~복지~소비 라는 형태로 추론한 문제를 상정한 것은 여타 특별한 행복에 대한 광범위한 설문이나 측정의 도구가 없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우회로를 택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너무 오랫동안 부정확한 우회로를 사용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오늘날 거시경제학이 처한 제문제들 중 가장 심각한 비판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정확한 예측을 줄 수 없다는 (심지어는 방향조차도 줄 수 없다는) 것인 아닌가하는 비판이다.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비판은 과연 소비가, 혹은 성장이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온다. 이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면, 코스피 3000을 부르짖던 2007년 말의 광풍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현실로 다가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답이 자명해 질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계속되던 와중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행복, 혹은 복지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대체적인 지침으로서 '소외'를 생각할 수 없는가를 말이다. (나는 항상 '대체'라는 말을 쓸 때 마다 드는, 뭔가 모자른 듯한 이 느낌을 매우 싫어하지만) 적어도 '행복~소외받지 않음'이 '행복~복지~소비'라는 형태의 접근보다는 더욱 설득력있는 접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경제학이 이끌어 온 성장과 기술진보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그건, 말하자면 다른 의미로 접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성장과 기술진보를 통해 광고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형태의 접근이 되겠지.
 극단적으로 평하자면, 요즘의 (거시)경제학에는 사람이 없다. 인적 자본이라는 형태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외관적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거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가 전혀 없다. 혹자는 그런 것은 사회복지학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 경제학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그럼, 경제학은 누구를 위한 학문이냐고. (국가)경제라는 추상적이며 거대한 체계가 자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대리만족을 느껴야하나? 당신은 지금 정권이 역대 최대 수출실적을 올리는 중이라며 팡파레를 울리는 와중에서 정말 자신이 행복해졌다고 느끼나? 난 내가 7살 무렵, 가족이 지하방에서 살면서도 매일 저녁 아버지가 과자 한봉지를 사오기를 기다리고 동생과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장난을 치며 놀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기억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그런 행복에 대한 기억조차도 만들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랐을 때의 미래도 더욱 걱정이고.
 아직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을 학문적으로 설득력있는 결과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렇지만, 이제 경제학이 좀 더 인간 사회에서 '도발적'이며 '본질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도대체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2011/04/15 20:23 2011/04/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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