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식 전야

손가락 2006/10/30 15:29
곧 있으면 서구권에서 성인식을 하는 날이 온다. 말하자면 과거 우리나라의 관혼상제 중에 '관'에 해당하는 행사를 치르는 날이다. 과거에는 미성년자(?)가 성년자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많은 악귀들이 이들의 동정을 빼앗기 위해 출몰한다고 여겨져 악귀를 내쫓는 행사를 하고는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른바 할로윈 데이의 기원. 최근 들어서는 할로윈데이 파티를 한다고들 난리인데, 바로 오늘 학생회관 앞에서 무슨 단체에서 (학교 동아리인듯 했다만) 할로윈 데이 파티를 한다고 선전을 붙이고는 상당히 시끄러운 흑인음악을 틀어놓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지 않은지라 조용한 마음으로 공부를 마저 해야하건만 어찌된 일인지 음악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행사를 한다고 하는 족속들이 어차피 다른 학생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번만은 기분이 더욱 나빴다.

내가 아는 시민 사회중에 가장 빠르게 미국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어느새 추석과 설은 놀러나가는 휴일이 되어버리고, 그들의 마음 속에 명절은 추수감사절과 성인식 전야제, 온갖 - 데이 들로 가득차 있는 듯 하다. 추잡한 한국의 정치만큼이나 추잡한 돈벌이의 주된 수단이 되어버린 줄은 알겠지만, 이제는 정체도 알 수 없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난리를 치는 것까지 따라하니, 조금 있으면 미국에서 매년 벌어지는 할로윈 데이 살인 사건들까지 스크림 가면을 뒤집어 쓰고 따라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언제부터 한국에서 미국어가 성스러운 그들만의 언어가 되어버리고, 한국말은 촌스럽고 천박한 언어가 되기 시작했는지 나도 그 기원을 알 수 없다. 요즈음의 한국 상황을 돌아보면 딱 두가지 사건이 떠오른다.

첫번째는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당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창제한 왕조의 국왕과 그를 반대하는 이들의 싸움. 문득 위에 언급한 이들에게 묻는다면 "왜 한글같은 '촌스러운' 말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반색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두번째로는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있던 일들. 당시 영국에서는 귀족들은 당신들이 숭배하는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그들의 말로 사용하고 있었다. '천박한' 영어 대신 '고귀한' 프랑스어가 그들의 귀족적 취향에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시 프랑스 사람들 중 90%에 가까운 사람들의 직업이 영국인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농부였는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인들이 그렇게나 신성하게 여기는 영어는 정확히 말하자면 '천박한' 미국 빈민층의 언어를 따라하는 것이 아닌지나 모르겠다. (사실 제대로 된 영어는 꽤나 복잡하고 미묘하게 단어선택을 한다고 한다. 줄임말 따위는 쓰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한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에 대한 미묘한 죄책감 사이에서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허위의식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이 땅에서 살아온 20여년의 세월이 나를 그것들에 대해 부정하기보다는 인정하도록 바꿔놓은 듯 하다.
2006/10/30 15:29 2006/10/3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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