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는 계속
Ceteris Paribus? 2006/08/06 00:29삶의 본질이 무엇인가? 맥락도 없고, 뜬금도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지난 5000여년간 인간은 많은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날렸고, 수많은 태양을 손가락으로 가려왔다. 결국 아무도 그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삶의 본질에 대해 모든 인간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답은 얻어지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에 대해서 과연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과연 옳은 질문인가를 묻는다. 결국 질문에 대해 옳은 답을 무작정 찾아나서기보다는 과연 질문 자체가 답을 구하는 것이 가능한 질문인가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른바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위해 형식적, 의미론적 형태의 명제를 분석하여(?) 우리가 던져왔던 질문,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는 답을 구할 수 없는 형태의 질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는 결국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암으로 사망한다. 이른바 언어론적 전회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올바른 질문을 거두어 냄으로서 올바른 답을 구할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임으로서 철학적 사유의 범주와 효과를 경제화한 것이다. 그러한 사고와 관련하여 튜링 기계와 같은 개념들이 발명된다. 그러나 결국 다시 한 번 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국 그러한 질문이 옳은 질문인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튜링 기계도, 괴델의 논의도,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결국은 현 체계 내부에서 그러한 질문이 과연 '옳은' 질문인가에 대한 답은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알 수 있게 된 것은, 그러한 질문의 '올바름'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뿐.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말한 바처럼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 만은 알고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질문에 대한 이후의 진행과정을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가 질문의 진정성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서 기존의 철학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본질' 자체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그러한 질문 자체를 빚어낸 인간의 사고 자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 사고 이전의 것, 즉, 생물학적인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고 자체가 인간의 생물학적 속성의 하나로서 발명(진화?)된 것이며, 이른바 '추상성'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형이상학적 인간의 사고과정이 실은 모두 유전자의 속임수라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유연관계 내부에서 부차적으로 생긴 것, 특히 경제적 행위관계 내부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결국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답은 (기존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증적이며 실험을 위주로 하는 탐구를 통해 밝혀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이 두번째 질문을 내가 진행시켜나가야 할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면, 기존의 질문들은 모두 폐기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옳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쓸모없는' 질문의 형태이기 때문에. 나는 딱히 내가 위대한 인간이라고도, 새로운 것을 열 수 있는 인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질문이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두번째 질문이 설사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하나의 돌연변이이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