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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teris Paribus 2011/11/22 12:25
글쓴이의 전공에도 불구하고 경제에 대한 글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눈을 씻고 찾아 볼래도 찾을 수 없었던 이 공간. 굳이 변명을 하자면 뭘 모르던 소시적에는 아는 게 하나만 생겨도 신나게 글을 올려제끼고 본인의 무지를 방패(?)삼아 글이 내포한 심각한 위험성을 그냥 넘어가곤 했는데, 이젠 좀 더 아는게 생기니까 쉽게 어떤 상황에 대한 주장을 하지 못하게 되었더라 정도로 변명할 수 있겠다. 어쨌든, 간만에 본인의 전공에 대한 재미없는 이야기를 또 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consumer theory라고 한다면 많은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경제 교과서를 펴면 등장하는 수요-공급의 관계를 규명하는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전형적인 경제학의 영역을 다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 학부생때 지도교수께서 경제학은 수요-공급으로 시작해서 수요-공급으로 끝난다고 하셨는데, 어찌보면 간단해 보이는 이 관계 안에 상당히 다양하고 복잡한 주제들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교수님의 말씀에 부분적인 동의를 보내본다. 사실 수요-공급이라는 것은 소비자가 생각하는 적정 가격과 그에 따른 개인의 수요, 그리고 이를 전체적으로 총합(aggregation)한 총수요를 예측하고, 공급자도 비슷한 형태로 총공급을 예측하여 그 접점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시장청산(market clearing)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각 소비자와 공급자가 서로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이를 토대로 서로의 수요와 공급을 예측하여 적정 가격을 제시하는 일종의 경매상황과도 유사한 상황이 동반되는데, 이러한 부분은 학부생 및 고시생들이 배우는 기초 경제학 시간에는 거의 생략된 부분이다. 즉, 기본적으로 소비자와 공급자가 동등한 정보와 위치를 가지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는 불완전하고 비대칭적인 정보 - 소비자는 공급자의 생산비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공급자는 소비자의 수요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며 - 에서 비롯한 비대칭적인 상황 - 공급자가 (대체적으로) 우월한 상황에서 시장 가격을 결정한다 - 을 우리가 바라보고 있기에, 이러한 밑도 끝도 없이 생략된 가정에서 비롯한 이론이 많은 경제학 입문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경제학 입문자들이 아담 스미스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니) 게다가 한국의 상황은 미국의 상황보다 더욱 비대칭적인 상황인데, 이는 핸드폰 시장 하나만을 봐도 알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애플의 아이폰을 볼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애플의 가장 큰 장점은 fancy한 디자인도 아니요, 하이엔드급의 기기 성능도 아닌, 소비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마치 잘 작동하는 것 같이 소비자에게 보여주는 소프트웨어의 부드러움에 있다. (software니까 soft하지. 이건 무슨 말장난인가 싶다.) 말하자면 소비자가 원하는 수요를 정확히 예측하고, 그에 대한 willingness to pay를 예측한 가격 산정을 통해 시장에서의 위치를 점한다. 그리고 제품군의 다양성을 최소화해서 제품군의 가격차별화를 확실하게 하고. 물론 독점적 지위와 관련해서 말이 많기는 하다만, 일단 그런 것은 제쳐두고서 볼때 경제학에서 보는 공급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한국 기업인 삼성은 일단 생산자 위주(만)의 생산을 한다. 즉, 하드웨어의 성능향상과 (상당한 부분이 인건비 착취에서 비롯되는) 비용 최소화가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니, 소비자가 컨수머 리포트 필진도 아니고 cpu성능의 차이를 얼마나 체감하겠냐고. 오히려 하이엔드 부품 달아놓고 무겁고 비싼데다가 소프트웨어 이식이 낮아서 기기성능의 반도 제대로 체현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삼성 핸드폰보다는 실제 성능이 느리던 빠르던 더 부드럽게 움직여주는 애플 아이폰이 더 '빠른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지. 그걸 캐치하지 못하고 광고 내내 애플보다 기기성능 상으로는 훨씬 좋다고 선전해봐야 그게 얼마나 먹히겠냐는 거다. 생산자가 해야하는 역할 중에 소비자의 수요를 정확하게 예측해야 하는 역할이 동반되야 시장 청산과 균형가격이 나타나는데, 그걸 못하니 계속 과공급이 생기고, 그런 과공급을 인건비 및 요소가격(하도급 부품가격) 착취로 메꾸려고 하는 상황이니 이건 뭐 멍청한 상사 덕에 부하들만 쥐어 터지는 꼴이라. 이건 뭐, 한국기업과 미국기업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 보다는, 기초적인 이론이 얼마나 강력하고 정확한 실제 경제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예시인거라. 말하자면 이 글은 많은 경제학에 입문하는 초년병들이 기초이론을 등한시하고 간단하게 설정된 ceteris paribus라는 '가정' 안에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이런 저런 상황 설명을 해주려고 쓴 일종의 변호문인 셈이다.
wizmith
2011/11/22 12:25
2011/11/22 12:25
Ceteris Paribus 2011/04/15 20:23
<한국을 떠나오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며>
최근 거시경제학 공부에 집중하면서 성장의 문제가 가장 첨예하며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주제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것인가? 그러나 이 성장의 문제는 소비를 통한 복지의 평활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우회로서의 방법론이지 궁극적으로 복지와 행복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든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성장의 문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어떻게하면 달을 정확하게 가리키게 할 것인가를 문제로 삼는 것이지 달 자체에 대한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달 자체를 탐구하기가 매우 애매하고 어려운 문제라 지침으로서의 의미가 있던 것이지. 그렇다면 그 손가락이 가장 좋은 지침인가? 나는 그렇지않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다른 지침들도 지금에 와서는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행복~복지~소비 라는 형태로 추론한 문제를 상정한 것은 여타 특별한 행복에 대한 광범위한 설문이나 측정의 도구가 없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우회로를 택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너무 오랫동안 부정확한 우회로를 사용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오늘날 거시경제학이 처한 제문제들 중 가장 심각한 비판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정확한 예측을 줄 수 없다는 (심지어는 방향조차도 줄 수 없다는) 것인 아닌가하는 비판이다.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비판은 과연 소비가, 혹은 성장이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온다. 이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자면, 코스피 3000을 부르짖던 2007년 말의 광풍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현실로 다가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답이 자명해 질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계속되던 와중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행복, 혹은 복지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대체적인 지침으로서 '소외'를 생각할 수 없는가를 말이다. (나는 항상 '대체'라는 말을 쓸 때 마다 드는, 뭔가 모자른 듯한 이 느낌을 매우 싫어하지만) 적어도 '행복~소외받지 않음'이 '행복~복지~소비'라는 형태의 접근보다는 더욱 설득력있는 접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경제학이 이끌어 온 성장과 기술진보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그건, 말하자면 다른 의미로 접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성장과 기술진보를 통해 광고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형태의 접근이 되겠지. 극단적으로 평하자면, 요즘의 (거시)경제학에는 사람이 없다. 인적 자본이라는 형태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외관적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거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관계가 전혀 없다. 혹자는 그런 것은 사회복지학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 경제학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다. 그럼, 경제학은 누구를 위한 학문이냐고. (국가)경제라는 추상적이며 거대한 체계가 자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대리만족을 느껴야하나? 당신은 지금 정권이 역대 최대 수출실적을 올리는 중이라며 팡파레를 울리는 와중에서 정말 자신이 행복해졌다고 느끼나? 난 내가 7살 무렵, 가족이 지하방에서 살면서도 매일 저녁 아버지가 과자 한봉지를 사오기를 기다리고 동생과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장난을 치며 놀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기억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그런 행복에 대한 기억조차도 만들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랐을 때의 미래도 더욱 걱정이고. 아직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을 학문적으로 설득력있는 결과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렇지만, 이제 경제학이 좀 더 인간 사회에서 '도발적'이며 '본질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도대체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wizmith
2011/04/15 20:23
2011/04/15 20:23
분류없음 2010/12/10 16:34
어느덧 미국에 온지도 6개월이 다 되었다. 유학생 생활이라는데 이건 뭐 한국에서 생활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연구실에 있는 애들의 국적이 좀 다양화되었다는 점 외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여전히 집에 틀어박혀서 증명들과 싸우고 있고, 소위 말하는 '주류' 학문을 배운다는 생각은 전혀 안드는 삽질의 연속이다. 과연 한국에서 배우던 틀이 좁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닫게 되었고, 그다지 다를 건 없지만 내가 알고있던 세계가 proper subset이라는 사실만은 거의 반증 불가능할 정도로(!)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전에는 미시가 좀 더 axiomatic하고 거시가 미시적 가정들을 무시하는 사기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있었는데, 이것도 상당부분 수정이 되었다. 미시는 좀 더 플라톤스러운 세계이고, 거시는 굳이 말하자면 post-modern한 세계에 가깝다는 정도라는 것이지. 한국에서 내가 배운 것들은 상당부분이 여기선 최소 20년 전에서부터 써먹었고, 지금은 갈때가 된 것들이 (물론 필요하긴 하지만) 대부분이라는 것이지. 여간. 무슨 기분으로 살고 있는지, 혹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하는 생각을 잊은채로 살다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고, 지금도 무슨 생각으로 글을 쓰는지조차도 불분명하다. 말하자면 뇌세척이라는건데, 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에서 알던 것들은 잊고, 새로운 것들로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텔레비전이나 뉴스를 통해 세계를 접하던 가장 기본적인(?) 통로마저도 닫고 살다보니 더욱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된다. 먹고 자고 공부하는 동물이 된 느낌이라고 하면 적당할까. 내가 한국에서 닮고싶지 않았던 어떤 패턴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반복학습 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나름은 소심한 발버둥을 쳐보려 하지만, 글쎄,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한들 그게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문득 여기와서 느끼는 건데, 내가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려한건지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조차 부족하다면 부족하달까 그런 느낌이 든다. 정말 지난 6개월간 한 번도 나에게 그것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으니까. 난 애초에 누군가를 위해 공부한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으니까. 적어도 생존이라는 측면과 더 가까우면 가까웠지, 그게 남들을 위한다거나 과시를 위한 목적과는 애초에 거리가 있는 행위이지, 이 공부라는게. 안하면 죽게 생겼고, 모르니까 환장하겠는 그런 상황.그러다가 생존 목적의 생업의 도를 넘어서게 되고, 그에 대한 변명을 하려다보니 난 공부가 좋아서 한거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한 거고, 그러냐? 그럼 좀 더 해봐라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온거지. 뭐 이젠 전처럼 별다른 자기 합리화나 이상 부여는 할 수 없는 (하지 않는) 좀 더 담백한 상황에 내가 이른 것 같다. 그래서 전처럼 굳이 나에게 질문하고 답하고 부정하는 상당히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담백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다. 뭐, 이런 심적 상황에는 이젠 학점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걸 할 수 있겠다는 나름의 부담없는 환경이 있지만, 그러한 부담이 공부 자체의 가벼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보도 듣도 못하던 것들을 배우고, 한국에서 몇 년을 배워도 이해가지 않던 (정리되지 않던)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 상당한 희열을 느낀다. 더 하면 더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말 가끔 (상당히 가끔) 내가 배우고 있는 것들을 구토를 통해 게워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진절머리나게 이해가 안되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익숙하게 참고 다시 삼킨다. 삼키고 또 삼키고. 그러면서 지내는 중이다.
wizmith
2010/12/10 16:34
2010/12/10 16:34
손가락 2009/04/06 18:34
근래 글이 별로 없었다. 무슨 이유를 대든 변명임은 자명하므로 쓸데없는 변론은 늘어놓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최근 근황이라면 거동이 불편하여 가만히 앉아서 GRE 따위에 매진하고 있었다는 것과 심심함을 참지 못하여 이것저것 기웃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음악을 하려는 생각을 그만두고 있는 장비와 연습실을 매각했다는게 최근의 가장 큰 사건이라면 사건이라고 하겠다. 이젠 정말 여유란 것이 눈에 띄게 사라져가고 있다. 근래에 텔레비전에서 여러가지 일들이 터지고 있다. 국회에서는 최저임금법을 잠정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주장도 흘러나오고 온갖 리스트에 북한 - 뭔가 더 중립적인 고유명사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쓰기에는 한계가 있다 - 이 장거리 발사체 실험을 하는 일도 있었다. 행정부 수장 - 한국에는 국가원수가 없으므로 - 이 해외순방 중에 지역 신문사에 기고했다는 논설문이 오바마 정권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묘한 기사도 있고 - 오바마 마음 움직인 'MB 기고문' 조선일보 정치 4/4 - 여간 정신없는 일들이 계속 터지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야당의 한 정치인은 자신이 이전 총선에서 했던 발언을 노골적으로 뒤집으며 정치적 '재기'를 시도하고 있고 야당 수뇌부는 그것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한국의 정치상황은 소위 말하는 지네 게임(Centipede Game)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사진 츨처 : 위키피디아 - 참고) 즉, 게임의 결말은 정해져있고, 효용의 전체 양은 정해져 있지만, 자신이 교섭권을 가진 차례에 상대방에게 극단적으로 적은 (그러나>=0인) 효용을 제시해도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그것이라도 얻는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거나 더 나으므로 그러한 교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제의를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다음 차례에는 자신이 역으로 더 많은 효용을 가질 수 있는 - 지금 상대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행태를 취할 수 있는 - 기회가 있으므로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나눠가지는 효용은 초반의 효용보다 극단적으로 적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 (극단적인) 합리성이 추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실험을 일반인들에게 한 경우이다. ( 참고) 일반인들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협상의 방법을 취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보다 적은, 그렇지만 극단적이지 않은 효용의 양을 제안한다. - 6:4 라거나 7:3 이라거나) 그리고 상대방의 경우에도 턴이 계속 바뀔 경우 효용의 절대 양이 적어진다는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으므로 그러한 제안을 적당(reasonalble)하다고 받아들인다. 즉, 자신이 가진 교섭권에 의한 절대적 우위를 요구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교섭권을 이용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과연 한국의 정치인들은 모두 극단적인 합리성을 취하는 게임의 '마인드'가 몸에 밴 사람들인가. 그런데 실험에서 게임이 극단적인 합리성을 취하는 경우를 또 다른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바로 자폐아들의 경우이다. 아아. 참고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홈페이지의 스킨 이름도 '자폐'이다. 참고 바람.
wizmith
2009/04/06 18:34
2009/04/06 18:34
Ceteris Paribus 2008/09/24 21:48
MWG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지금 보고 있는 Signaling & Screening, 다음 chapter인 Principle-Agent Problem이 끝나면 사실상 MWG는 다시 한 번 다 보는 셈이 된다. 물론 그 다음 부분인 General Eq. 부분과 Mechanism Design 부분은 다른 책으로 보게 될 것이다. 무려 1년이나 걸렸다. MWG 완독이라니. 여간. Signaling부분을 보고 있다. 가장 간단한 경우이므로 signaling은 생산성의 차이를 낳지 않는다고 본다.
문제는 Signaling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한 양의 봉급을 주는 것과 Signaling이 가능한 상태에서 생산성에 따라 다른 봉급을 주는 두 가지 경우(Seperating Equilibrium)에 대해 각각의 균형에서 어떻게 Pareto Improvement가 일어나는지 본다면 낮은 생산성을 가진 이들은 Signaling이 가능해지면서, signaling에 들어가는 비용의 부담이 생기므로 항상 Pareto disimproved되나 높은 생산성을 가진 노동자들은 signaling에 들어가는 비용에 따라 상대적인 improvement의 여부가 정해진다. 즉, Signaling에 드는 비용이 과다해진다면 오히려 signaling을 하지 않는 편이 상대적으로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signaling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입장에서 모두에게 같은 돈을 주는 (signaling이 불가능했던 경우처럼 취급하는) 경우 (Pooling Equilibrium)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모든 노동자에게 같은 일정 수준의 signaling을 요구하고 모두에게 같은 봉급을 주는 것인데 아예 signaling이 불가능했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회사가 얻는 생산력도 동일하며 각 노동자들이 얻는 봉급도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signaling 비용이 들어가므로 오히려 Pareto disimproved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signaling을 하는 경우가 equilibrium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고생산성의 노동자가 signaling을 하지 않게되어 저 생산성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두번째 문단에서 줄 친 부분, 즉 생산성의 차이를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signaling의 비용으로 인해 사회적인 효용 수준이 Pareto disimproved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이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인데 각종 특수 중,고등학교의 진학과 대학의 진학을 위해 signaling에 과도한 투자를 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까먹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signaling이 유지되는 이유는 세번째 문단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signaling이 없음으로 인해 저생산성으로 취급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오늘날의 과도한 교육열풍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wizmith
2008/09/24 21:48
2008/09/24 21:48
Ceteris Paribus 2008/06/26 14:31
생각해보면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4년이 넘어간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한 경제학을 전공으로 삼겠다고 생각하기까지 몇가지 우연들과 감사한 분들의 호의와 더 이상 좋을 수 없었던 조건의 영향이 있었다. 그리고 군복무를 하면서 과거에 했던 공부들을 정리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무엇이 한 걸음을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지난 시간동안 좌시했던 문제들에 왜 그렇게 선현들이 매달려왔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조금씩 얻어가고 있다. 역시 공부도 짬이 차고 볼 일이다.
최근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문제는 사회적인 합의와 최선의 문제이다. 사실 이미 60~70년대를 거치면서 소위말하는 일반균형이론으로 정리가 되긴 하였지만 그 배후에는 (1년 반 쯤 전의 포스팅에서 말했지만) 정치적인 합의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즉, 경제학이 기본적으로는 정치경제학이라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의 게임이론이나 메카니즘 디자인의 문제에서도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기준이 될 것이며 사회적인 정의와 공동선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합의를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문제이다.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헤메지 않는 건 아니지만) 수학적인 엄밀성과 직관적인 공식의 도출에 눈을 기울였다면 지금은 그것들이 나타내는 결과를 이미 알고있기에 거기에서 출발해 가정된 체계가 무엇을 나타내는 가에 대한 문제를 바라보려 노력한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가 말하는 '좋음에 우선한 옳음'이라는 것이 어떠한 형태로 경제학적 탐구에 반영이 되었는가의 문제도 그러한 문제의 하나이며 최근의 흐름이 반영하는 진화적 형태의 동학 또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무엇이 극도로 다원화되고 분화된 개인들의 기준을 반영할 수 있는 원칙이 될 것인가, 혹은 그러한 개인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평등하다고 느낄 만하게 대우해 줄 것인가의 문제를 한정된 자원의 틀에서 논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사회가 반영하고 있는 전통과 문화의 파악이다. 일전에 김영세 교수님이 수업시간에도 말씀하셨듯 경제학자가 한낱 기술자로 남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밟고 있는 땅이 어떤 땅인지, 누구의 땅인지를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에는 철학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게 결국인지 아닌지는 더 두고봐야 할 일이지만. 결국 무엇이 옳은가, 좋은가, 옳고 좋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옳고 좋음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의 문제들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시작할 때 그것으로 시작하였고 그것들을 잊고 있었고, 엉뚱한 길로 온 것이 아닌가 고민했는데 결국은 그 길로 오고 있었다. Don't Be Myopic, boy.
아. 그리고 위의 그림은 Simpsonize Me 한 그림이랍디다. 비슷한감?
wizmith
2008/06/26 14:31
2008/06/26 14:31
Ceteris Paribus 2008/05/09 23:14
MWG Microeconomic theory를 보는데,
....As a general matter, in gmaes in which ther can be an infinite sequence of moves, the definition of a subgame perfect Nash equilibrium remains that given in the finite horizon game : Strategies must induce a Nash Equilibrium in every subgame. Nevertheless, the lack of definite finite point of termination of the game can reduce the power of SPNE concept because we can no longer use the end of the game to pin down behavior. In which ther is always a future, a wide range of behaviors can somtimes be justified as sequentially rational (i.e., as part of an SPNE) .....
(특히나 Reaganomics시절의) 미국인들은 밑도 끝도 없는 미래에 대한 낙관론을 이런 걸 써서 증명하려고도 했었다.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낙관론을 써먹으려고 하는데, 도대체 이만큼이나마 근거를 가지고는 하는지 모르겠다 (뭐, 이 근거가 현실적인 rationality를 갖는지는 번외의 문제로 하고) .
추신 ; 아, 제가 트랙백한 원문 작성자에게 특별한 악감정이 있어서 이런 글을 쓴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는 소중한 법이니까요."
wizmith
2008/05/09 23:14
2008/05/09 23:14
Ceteris Paribus 2008/04/20 19:02
최근에 여러가지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들에 대해 정리를 할 기회가 없어서 나름 정리를 해보고자 마음을 먹고 컴퓨터를 켰다.
1. 주유소 가격 인터넷 공개
2. 영화관 가격 담합
3. 뼈있는 소고기 수입 재개
정도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2번과 3번은 차차.
1. 주유소 가격 인터넷 공개
얼마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서 전국 약 60%의 주유소 가격이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지금 들어가보려고 하니 사이트 점검중이란다. 실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공개가 되고 있는지 다시 한번 논의해야겠지만 일단 상황은 이렇다. 전국의 주유소 사이트의 가격 공개가 시작되고 이러한 가격정보는 소비자와 공급자 양측에서의 접근이 모두 가능한 상황이다. 주유소 업주들은 (주유사가 아닌) 가격 공개로 인해 소비자들의 가격 압박이 심하게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쉽게 받아들이는 듯한데 실은 썩 그렇지도 않다. 일단 주유소 가격 정보가 공개되면 주유소 간의 가격 격차가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되므로 일정 지역내의 주유소 가격들이 종래의 지역 가격차의 평균정도로 맞추어 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즉, 지역 내에서 편차가 생기던 가격차가 평준화 된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일부 업소의 가격 하락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일부 저가의 업소들은 가격을 일부 올릴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이러한 가격 평준화가 가격 선도의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가격이 평준화되고 그러한 가격이 공개적인 정보가 된다면 한 업체의 가격 상승에 대해 다른 업체들이 암묵적인 동조를 하면서 가격이 전체적으로 상승되는 현상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형소매업계에서도 이마트가 소위말하는 '최저 가격제' (다른데서 더 싼 거 가져오면 5000원 더준다는 식의) 를 통해서 업계 내부에서의 암묵적 가격 선도자 역할을 하는 상황을 본다면 이같은 가격 공시는 이런식의 가격 선도자 역할을 정보를 공개하고 있는 공급자 전원에게 가능하도록 해준다. 게다가 유류는 소비자에게 생필품에 가까우므로 사실상 비난을 하면서도 살 수 밖에 없으므로 소비자는 가격 결정에 사실상 영향을 미치지 않는 price taker 이다. 정부가 유류세를 인하한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유류세 비율도 엄청나게 높을 뿐더러 유류세 자체가 commodity tax이므로 교과서적으로 볼때도 deadweight loss는 이미 상당하다.....결론은 정부시책으로 인해 그동안 소비자들이 암묵적으로 누리던 가격 격차에 의해 누릴 수 있던 이익도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 정부는 주유소매상들의 암묵적 가격 담합을 사실상 허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wizmith
2008/04/20 19:02
2008/04/20 19:02
손가락 2008/02/14 19:20
요즘 공부를 좀 등한시 하고 빈둥거리고 있는데 본교 교수님 홈페이지에 놀러갔다가 비보 접보.
http://www.people.fas.harvard.edu/%7Ekojima/papers.html
2006~07 2년간 13편 퍼블리싱. 그중 세편은 AER.
게다가 전공이 Mechanism design & Learning Theory.
딴 짓 하면 죽겠구나 싶다.
그저 공부나 해야지.
wizmith
2008/02/14 19:20
2008/02/14 19:20
Ceteris Paribus 2007/03/12 01:28
http://cafe233.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Yg1B&fldid=2saR&contentval=005pczzzzzzzzzzzzzzzzzzzzzzzzz
&nenc=mMBGM9n1_rJRLBVyVLfG7Q00&dataid=22420&fenc=XieqGnB4pIU0&docid=CDd8mqWX
꽤나 오랫동안 즐겨보던 드라마가 오늘 종영했다. 다들 익히들 아시겠지만 '하얀거탑'(고유명사인 바, 붙여쓰겠다는). 맨 처음에 번역된건 꽤나 오래전인 것 같았는데 (아마 내가 고등학생 때?)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한다고 해서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를 보고있자니 10 여년이 지나는 동안 나의 가치관이 변한 것인지 혹은 드라마 작자의 의도가 개입되어 인물들에 감정 이입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과거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나는 무엇때문에 이 짓거리를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정확히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5둴 무렵) 처음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무슨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어떤 책을 읽었고, 그로부터 내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진리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부터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은 시작되었다. 단순하게도 나의 목표는 오로지 '무엇이 가장 참된 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공부를 해 본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때부터 동네에서 개망나니로 소문난 건 기정사실이었고, 사실 내가 고등학교를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기숙사 학교로 가게 된 것도 부모들이 사고치는 자식을 '저놈의 자식, 군대나 갔다오면 정신 차리려나'하는 입장에서 였던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조금은 (소위 말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고 아주 맹목적인 목표를 가지고 대학까지 진학하게 되었다. (정작 그런데 대학 진학 과정에서는 부모가 생각하는 사람되는 과정과 내가 생각하는 사람되는 과정이 상당히 달라서 진통을 겪고, 뻘짓거리로 1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공부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적어도 공부라는 것을 인생의 업으로 삼기 위한 초입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초입에 들어서서 길을 보게 되니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그 길이 잘 닦인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지 않은 표지들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고, 정체를 알수 없는 입간판들이 서서 길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것들이 (이제 막 초입에 들어섰을 뿐인) 여행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나는 무엇을 찾으려고 이 길을 나선 것일까? 예기치 않게 결단을 맞이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반추했다. 죽음이야 인간에게 어쩔수 없는 숙명이니 그렇다고 쳐도, 그 순간에 그는 자신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무엇때문에 이 길을 가는 건가. 어줍지 않은 자기 과시와 학적 성취라는 거창한 휘장을 어깨에 달기 위해서, 혹은 자기의 후손들의 만세번영할 부귀영화를 위해서? 그 어떤 것도 금의야행(錦衣夜行)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금의(錦衣)를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는 자신에게 충분히 만족한 옷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wizmith
2007/03/12 01:28
2007/03/12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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