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선거공고
인터넷을 통해서 내가 자주보는 종류의 것들을 분류하자면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되는데, 첫 번째는 연합뉴스의 글로벌 경제 기사이고 두 번째는 한국 프로야구 기사들이고 세 번째는 웹툰이다. 첫 번째 것과 나머지 것들의 차이를 굳이 따지자면 첫 번째 기사에는 댓글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두 번째나 세 번째 것들은 기사를 보는 시간보다 댓글을 보면서 웃는 시간이 더 많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각설하고, 그리스의 구제금융과 긴축정책 이행이 최근 글로벌 경제 파트의 핫이슈인데 가끔 한국 신문들에서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 아직도 그리스가 겪고 있는 문제가 과도한 복지에서 비롯되었다는, 말하자면 복지망국의 신조들을 읊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그 문제가 사실 누구탓인지를 책임소재를 정확하게 해보자는 생각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 원인은 당신같은 노인네들 탓이라고 하겠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득권의 이익을 즉시적으로 볼 수 있는 정책에는 '복지'라는 이름으로 근거없는 인센티브를 남발한 문제가 크다는 것이다. 반면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국민들의 전체적 복지수준과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정책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말하자면 정책의 비효율성이 만들어는 극단적인 반례인 것이다. 뭐, 고위공무원 수당 인상하고 이미 납부된 연금납입액 보다 높은 연금배당금을 받겠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게 복지제도라고 말하고 싶다면 할 수 없지. 그렇게 치면 대학 등록금 인상도 장기적으로는 교원들의 임금향상분에 기여하므로 그것도 복지정책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먼산).
지난 번 포스팅한 글 - '거시호구의 거시' - 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동태적 비일관성이 이러한 재정 파탄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한 부분이 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지금의 그리스의 상황이 상당히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무엇이 동태적 비일관성이며, 그것이 어떻게 정책의 비효율성을 초래하는지를 생각해보고 조금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작금의 복지 '포퓰리즘' 논쟁이 어떻게 논점을 흐린 물타기를 시도하는지를 이야기해보자.
논점이 일관된 정리된 글을 링크해둔다. 아래 링크의 글을 읽고 이 글을 읽는다면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링크-프레시안>
1. 첫 번째, 동태적 비일관성이 어떻게 구현되었는가.
가장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조삼모사의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오늘 세 개인가 내일 네 개인가를 오늘 결정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 네 개를 생각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러한 문제를 결정하는 입장에서 나눠 먹어야 할 사과를 자신들의 주머니에 챙겼다는 점이다. 비유에서 벗어나 생각해보자면 국회의원들이 예산안을 짜는데, 그 예산안을 증액하면서 자신들의 판공비도 높이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판공비가 여타 국민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복지정책에 돌아가야 할 것이었고, 그러한 복지정책의 장기적 누락이 전체적인 국가 생산성의 하락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지적하였듯, 국가부채란 미래의 국가 생산성 혹은 성장률에 대한 기대의 반영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그렇기때문에 국가부채를 돌려막는 - 영어로도 rolling한다고 하는데 - 상황을 가능하게 하려면 최소한 현재의 성장률을 부채의 만기가 형성되는 기간까지는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결정의 권한을 가진 그리스의 정책결정권자들은 본인들이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그러면서도 그 대상범위가 명목상으로는 무차별적인 정책에 많은 재정을 할애한다. 한국으로 치자면 교육 재정을 증액하면서 그 증액부분의 상당수를 외고/과고 혹은 고급 사립학교에 할당하는 식일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명목상으로 그러한 재정 할당은 '복지'이지만 그 수혜 계층은 철저하게 일부에 국한된 형태였던 것이다. 반면 그러한 재정의 부담은 세금과 국채 발행을 통해 국민 대다수에게 분담을 시킨 것이고. 이러한 상황은 소위 말하는 '주인-대리인 문제 - Principle-Agent problem' 와도 얽혀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은 추후 다른 포스팅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여간 그러한 장기적인 성장률의 유지라는 전제가 노동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를 통해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졌어야만 어찌되었건 증액된 재정의 부담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부채의 만기와 함께 찾아온 생산성 하락은 국채 발행을 통한 재정의 돌려막기의 가능성을 무너뜨렸다.
2. 복지 '포퓰리즘'의 물타기
일단은 도대체 어디서 유래했는지 모를 정체모를 외래어의 한글 표기에 비웃음을 흘릴 뿐이다. 한글 맞춤법의 '오렌지'를 무시하고 '아륀지'라고 우기시는 분들이 영어로도 한글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외래어를 왜 사용하시는지.
작금의 복지정책 - 정확히는 무상급식 - 이 이를 통해 대중인기에 편승하는 정책이라는 비판하는 입장인데, 문제는 그러한 복지정책의 가장 큰 수혜계층이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가정형편이 넉넉한 집 아이들까지 무상급식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이전부터 가정형편이 넉넉치 못했던 아이들이 그 수혜를 선택적으로 받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복지의 수혜가 전체에게 제공됨으로서 선택적 복지가 주었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한다면 그것을 복지의 혜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려나.
문제는 이 복지의 수혜를 통해 일반대중의 효용증가가 생산성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이다. 효용의 증가가 장기적으로는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온다면 이러한 생산성의 향상이 국가 성장률의 토대가 된다는 주장에는 딱히 토를 다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급식을 통해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선택적 급식을 받는 아이들은 그 존재가 어찌 되었든 다른 아이들에게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런 아이들은 -그렇지 않을만큼 생각이 건강한 아이들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하지만 - '밥 빌어먹는' 아이라는 인식을 친구들에게 주게된다. 그러한 상황은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들 사이를 구분짓는 눈에 띄는 차이가 되게 마련이다. 최근의 패딩논란을 보면서 아이들이 그들 모두를 순수하게 대한다는 환상 속의 그대는 없으리라 가정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결국 구분지어진 아이들은 학교 생활에서의 적극성을 잃게 되고 학업성취나 교우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확률이 높다. 학업 성취를 학교에서의 생산성으로 치환하자면 요즘처럼 공교육의 질 하락문제가 논란이 되는 와중에서는 그들이 사교육의 수혜를 받지 못할 확률이 더욱 높으나, 이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학업성취의 저하는 대다수의 경우 피하기 힘들다. 본인의 과거 경험만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러한 사례가 있음을 더욱 강하게 인증할 수 있다.
이를 사회 전체의 생산성으로 연결지어 생각해보자. 요즘 소위 말하는 보수논객들이 '젊은이들이 꿈이 없고 도전이 없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전무한 사회 복지망이 그 원인이다. 즉, 보수논객들이 한창일 나이에는 실패와 재기에 대한 가능성이 충분했다. 말하자면 시골에서 빈 손으로 상경해서 실패해도 어디선가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임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조건을 강요받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계층이 소수였으며 사회 전체가 발전 초기단계였으므로 노동력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그렇기때문에 취업의 가능성이 높았으며, 그러했기 때문에 허언섞인 '술마시고 면접을 보러가도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던 자랑이 완전히 헛소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노동계층, 특히 처음 취업을 준비하는 세대들은 술마시고 면접을 보러갔다가는 면접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굳이 현세대가 취업 과포화 상태임을 증명할 증거들을 일일히 나열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취업에 실패한 이들이 직장 밖에서 얻을 수 있는 복지의 범위는 극도로 한정되어 있다. 굳이 말하자면 기초 건강보험과 취업 교육정도. 최근 어떤 자동차 관련 전문지에서 외국의 아웃도어 인구는 대부분이 20-30대들이나 한국은 40-50대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사무실과 도서관에 탕진하지 말라는 요지의 기사를 보았는데, 그러한 상황에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미국만해도 미취업 상태에서 받을 수 있는 실업수당이 최대 99개월이다. 그 액수가 적을지언정 말하자면 7-8년은 명목상 국가에서 주머니에 용돈이라도 찔러 넣어준다는 말이다. 유럽에서는 직장과 관계없이 건강보험이 일괄적용된다. 놀고 먹다가 다쳐도 병원가면 어쨌든 적은 돈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전후사정을 고려도 하지 않고 젊은 세대들의 '안이'와 '나태'를 탓하는 당신들은 그 나이에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물론 민주화와 미래 세대를 위해 자신을 투신하신 분들도 많지만 그 분들은 대부분이 고 김근태 전 의장처럼 고통속에서 여생을 보내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 앞에서 병나발을 불며 안일함을 탓하는 이들의 과거가 지금 그들이 보이는 추태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갑작스런 열폭에서 벗어나 사회 안전망의 부재가 어떻게 생산성의 저하로 이어지는지 생각해보자. 한국의 경우 노동/기술집약적 산업에 산업경쟁력이 맞춰져있는데 전자제품/차량/선박 조립/생산 등이 대표적인 업종이다. 문제는 그러한 산업들의 경쟁력이 최근에는 기술, 디자인 등과 같은 요소들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의 생산성은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창의성'의 발달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아저씨들이 생각하는 '창의성'은 '창의성 개발 학습지'를 아이들이 잘 푸는 것으로 측정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정의하는 창의성은 실제의 창의성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고, 실제의 창의성은 개인 스스로가 가진 경험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사회 안전망의 부재는 실패의 위험부담을 그대로 본인이 떠안게하여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경험의 폭과 깊이를 심각하게 제한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의 다양성의 부재는 창의성의 부재로, 이러한 창의성의 부재는 생산성의 부재로 이어진다.
글이 너무 장황하게 긴 길을 돌아온 느낌이 없지 않은데, 여간은 일반 대중에 대한 복지가 생산성의 향상이라는 결과와 연결될 충분한 고리를 찾는다면 복지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그 추상과 같은 호통은 동네 바보형의 외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에 복지가 망국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복지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근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일부 만이 선택적으로 정책의 효과를 독점하는 것을 독점이라고 그들이 인지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복지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주장은 액면 그대로 맞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을 소위 말하는 주류 언론과 정당이 여과없이 흘려보내는 상황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야 말로 한국의 언론과 정치가 얼마나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