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의식'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8/06 구미호와 밥그릇
  2. 2008/07/26 영화보고왔다
  3. 2008/07/13 기포의 본체(2) - 이건 누군가 했던 것 같은데 (6)
  4. 2008/07/12 기포의 본체(1) - 이건 누군가 했던 것 같은데 (2)

구미호와 밥그릇

손가락 2008/08/06 17:27
정치도 경제도 정상인 상황이 아닌 가운데 날씨는 점점 더워진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가는 가운데 뉴스를 틀자하니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이 여전하다. 왜 한국에서는 말도 안되는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을 국민들이 구경해주어야만 할까? 밥그릇 싸움이 없는 곳이야 없지만 한국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은 밥그릇을 갖느냐 못 갖느냐의 원초적인 생계의 문제라기 보다는 누가 밥그릇에 얹힌 비싼 반찬을 집어 먹을 것인가 하는 기만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그런 반찬은 그들의 노동이나 희생의 대가가 아닌 부당한 정치적 독점에서 나오는 국민들의 잉여에 대한 착취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국민들 대다수는 밥그릇에 밥은 커녕 보리도 못 채워 먹을 정도로 힘든 보릿고개를 견뎌내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편 뉴스가 끝나고 어제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였다. 전설의 고향을 보았는데 역시나 단골 래퍼토리인 '구미호'편을 방영하기에 별 생각없이 보았다. 그런데 그 구미호가 말하는 레토릭이 조금 전에 뉴스를 보면서 고민한 그러한 문제가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던져주기에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설정은 구미호의 저주를 받은 가문이 이로 인한 멸문지화를 막기위해 초경이 시작된 집안의 여식들을 죽여 구미호의 발현을 막는다는 것이고 그 가문의 종손이 그러한 비극을 막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 와중에서 발현된 구미호가 집안을 풍비박산 낼 위기에 처하나 종손 덕택(?)에 그러한 변고는 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손도 20년 뒤에는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는 그러한 반전으로 극이 마무리된다.

종손은 초중반에는 그러한 만행에 대하여 천문학의 발달로 일월성신의 움직임까지도 예측하는 마당에 그러한 미신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그러한 의식에서 희생되는 가족들의 인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종손의 발언에는 인간에 대한 존귀함과 연민이 있다. 그러나 종손이 구미호의 처단을 통해 얻어진 구미호의 간과 피 등의 부속물(?)이 인간의 건강함과 장수를 누리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집안의 (죽은 것으로 된) 노인들이 집안 사당에 몰래 숨어 살면서 그러한 부속물의 섭취를 통해 비정상적인 장수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20년 후에는 그러한 행위의 중심를 역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정치의 역사의식의 부족을 대변하는 듯하다. 시청 후에 오늘날의 정치 상황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겹쳐졌다.

즉, 시대의 발달에 뒤떨어지는 구태적 정치의식에 대해 격렬히 다음 세대의 중심세력이 저항하며 그러한 저항에 대한 정당성을 대가로 그들 자신이 중심세력이 되는데 성공하지만 그 자신도 과거의 구태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보전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자신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역시나 과거의 중심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이전 세대에 대한 숭배와 비밀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익의 보전은 집단 내부의 약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대가로 유지되고 있으며 이러한 희생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형태로 계속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는 어디에서 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집단 내부의 문제제기를 통한 부당한 약탈을 근절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극 중 대사에서도 나왔지만, 구미호의 저주는 집안 사람들이 구미호로 변한다는 불확실한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미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데에서 오는 집안 사람들의 이유없는 희생인 것이다. 그리고 정작 발현된 구미호 자체는 자신을 해치려 한 부당함에 기인하여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만약 그러한 행위가 없었다면 구미호의 발현이 반드시 가족들을 해치는 행위가 되었을까? 그것은 집권 세력이 만들어낸 허구적 신화이며 그러한 허구적 신화에 대한 맹목적 종용이 그들 자신을 파국으로 이끄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허구적 신화에 대한 이의제기를 막지 않고 그러한 신화가 형성된 원인을 고민하여 부당한 희생을 막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해결책이라 본다. 물론 극중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희생이 집안의 부귀영화를 보전시켜준다는 식으로 성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21세기에 이르러 문명화의 시대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사회의 성장은 구미호 미신과 같은 허구적 행위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준비에 의해서 시작되고 유지된다는 것을.
2008/08/06 17:27 2008/08/0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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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고왔다

손가락 2008/07/26 21:25
 간만에 후임들하고 조조로 영화를 보고 왔다. 지난 달에는 <강철중> 봤는데 이번 달에는 <님은 먼곳에>를 보고왔다. 의지와 관계없는 스포일러가 되기 싫어서 줄거리는 줄이고 나오면서 느낀 것만 간단히 정리하자면

1. 뭘 말하고 싶은거지?
2. 설마. 70년대 한국의 봉건주의적 인습과 그로인한 등장인물들의 고통?
3. 또 설마. 월남전의 부조리성?
4. 주진모는 뭘로 나온거냐? => 아놔. 동명이인이로세.
5. 근데 80년대 넘어 제작되기 시작한 메이커의 악기들이 월남전에 막 등장해도 되는거냐?

이상입니다.
2008/07/26 21:25 2008/07/2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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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포의 본체(2) - 이건 누군가 했던 것 같은데

손가락 2008/07/13 11:41
 이외에도 한국 홈 드라마의 대표적 장르라고 볼 수 있는 일일드라마를 보면 그러한 주제의식의 확고함이 더욱 드러난다. 대부분의 일일드라마는 홈 드라마의 형식을 갖는데 매일 드라마의 전개를 위해서는 다양한 인물로의 시선의 분산이 필요하고 그러한 분산된 인물들을 한데 묶기 위한 장치로서 각 인물들을 (현재 혹은 미래의) 가족의 일원으로 설정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가족구도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가이다. 대부분의 홈 드라마는 주말(혹은 주중) 홈 드라마의 고정적인 메시지 (가족의 화합을 위한 가족구성원의 관습적 순종)의 변화는 고사하고 대부분이 기법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일 드라마의 대부분이 아직까지도 재벌가의 자녀와 평범한 집의 자녀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결혼의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여기서 동반되는 세대간의 갈등 및 계층간의 갈등을 매우 희화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최근 방영되는 '너는 내운명', '춘자네 경사났네', '애자 언니 민자' 등의 공중파 방송 3사의 드라마만 들어도 이러한 지적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연애 드라마(영화)는 최근 소재의 다양화 경향과 더불어 대중 소설을 원작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며 그러한 진부한 형태의 멜로 드라마에서는 벗어나고 있다. 적어도 갑자기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들 - 직장의 문제, 가족의 문제, 친구간의 갈등- 을 좀 더 현실적인 기법을 통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홈 드라마와는 달리 변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연애 드라마가 1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 까지를 대상으로 하며, 그러한 대상들이 유행에 민감한 세대임을 고려한다면 과거의 진부한 기법이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연애 드라마의 변화된 기법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에 지향점의 변화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기법들의 판이한 변화와는 달리 그러한 기법들을 통해 나타나는 기저의식의 변화에는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연애 드라마에는 기본적인 이야기의 진행과정이 있다. 즉, (생략되는 경우도 있지만) 연애의 시작 - 전개 - 갈등 - 헤어짐 - 고통(?) - 재회라는 형식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실제의 연애의 형식을 따 온것이고, 이외에는 연애 드라마의 형식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 헤어짐 이후에 고통이나 재회까지의 과정이 과연 실제로 얼마나 일어나는 지에 대한 생각은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은 연애물도 있지만 위의 과정을 답습하고 있는 드라마가 최근까지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연애 드라마의 본질적 문제는 서구 중세 기사도 문학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중세 기사문학의 그것보다도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에 대한 인식의 결여가 '돋보인다.' 사회적, 정치적 감정에 대한 관심이 없는 개인적 감정의 치중. 왜 공통의 관심사가 연애 외에는 없다고 보는 것인가? 연애에 대한 관점도 정치적, 사회적 관점만큼이나 다양하며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적 감정의 지나친 치중이 다른 곳에 돌려야 할 관심을 기포로 둘러싸 버린다. 그렇다고 그러한 개인적 취향의 집중이 공동선과 덕의 추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연애 드라마들에서는  현재의 개인들이 사회생활에서 느끼는 정치적, 사회적 감정에 대한 관심이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여자 주인공이 회사를 나오거나 이혼을 하는 일에 대한 개인적 짜증만이 있을 뿐 거기에 담긴 배경에 대한 분노나 기술이 없다. 모든 문제를 개인의 감정과 처신의 문제로 돌린다. 직장을 당장 그만두어서는 한 달도 생계를 잇기 힘든 상태와 그로 인한 남자 주인공에 대한 의존이 주인공 자신에게 짜증을 일으키지만 그 과정에서 여자 주인공이 느껴야 할 사회적 감정은 전혀 없다. 직장을 그만두니 먹고 살기가 힘들고 남자에게도 눈치보이니 직장을 잡아야겠다는 식의 커리어 우먼적 환상이 그 과정에서 응당 나와야 할 감정을 지운다. 왜 실업에 대한 사회적 보장책이 없는가? 왜 개인이 직장을 잃게되면 그에 대한 처신을 모두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한 의식이 동반되지 않는다. 그저 연애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균형'의 보존에 대한 욕구로 넘어간다. (물론 과거에 비해 그러한 균형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장족의 발전이기는 하다)  

정치적 감정이 각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르며 그러한 매체에서 그러한 정치적 성향을 포섭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연애는 그러한 측면에서 더욱 민감한 감정을 다루고 있다. 개인이 느끼는 성적 이상형이 모두 다르고 상대와의 연애 과정도 모두 제각각인데 그러한 차이를 연애 드라마는 어떻게 포섭하고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최근에는 개인들의 제각각인 정치적 성향에 대한 포섭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텔레비전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정부의 실정에 대한 국민들의 총체적 반대 등을 볼 때 정치적 성향을 상당부분 포괄하는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에 있어서도 자명한 형태의 선악구분과 '공공의 적' 식의 개인에 대한 분노와 그것의 보복적 형태의 해결은 지양되야 할 접근이다.
 
2008/07/13 11:41 2008/07/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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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포의 본체(1) - 이건 누군가 했던 것 같은데

손가락 2008/07/12 13:01


http://spacedark.egloos.com/1462469

나는 드라마를 좋아해서 자주 본다. 특히 여기와서는 연속적인 일련의 일들을 할만한 여유가 없으므로 (시시때때로 뛰쳐나가야 하니) 말 그대로 시간 때우기를 위한 텔레비전 시청을 한다. 한국의 텔레비전 편성은 드라마의 비율이 압도적이니 자연히 드라마를 자주 볼 수 밖에. 게다가 주말에는 버라이어티 쇼도 상당수를 차지하니 슬슬 뇌가 표백되어 가는 중이다. 그나마 요즘에는 딴 짓을 좀 하느라 텔레비전을 멀리 했지만.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기술하는 상황은 상당히 바뀌었다. 일전에 쓴 글 (기억상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1); http://www.wizmith.com/base/entry/기억상실에는-뭔가-특별한-것이-있다1 & (2); http://www.wizmith.com/base/entry/기억상실에는-뭔가-특별한-것이-있다2) 에서도 짤막하게 기술했 듯이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들은 소재면에서 최루적 기법을 사용(기억상실, 불치병)을 사용하여 그들의 사회적인 포위의식(?)을 기술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드라마들에서는 그러한 기법의 사용이 상당부분 사라지고 있으며 그러한 기법에서 나오던 메시지들도 상당부분 약화되거나 다른 메시지들로 교체되었다. 즉, 사회적인 의식의 변화와 그것들이 기술되는 일반적인 상황이 달라졌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홈 드라마의 경우이다. 홈 드라마의 대표주자라면 역시나 김수현씨의 드라마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전체적인 틀은 과거의 것들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 3대가족, 가까운 친척과 몰려사는 대가족, 고부갈등, 사돈간 갈등 등. 드라마의 전체적인 구성은 변하지 않았고 줄기차게 지향하는 '아름다운 보수'라는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부적인 인물들의 행위의 동기와 그것을 지지하는 드라마 작가의 관점이 변화하였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과거에는 부모에 대한 존경과 순종이라는 의식이 관습적인 의미의 당연함으로 해석되었다. '부모님 전상서' 같은 경우에는 주인공에 해당하는 가부장이 매일 고인이 된 부모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그러한 관습적인 의미가 해석되었으며 미화되었다. 그러한 행위에 대해 어떤 부수적인 이유는 동반되지 않았으며 대다수의 (중, 장년층) 시청자들이 공감할 만한 미화된 관습적 의식의 행위를 보임으로써 그러한 존경과 순종이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부모의 역할을 겸하는 중장년층의 (남자의 경우에는 은퇴를 계기로 비롯되는 경제적, 정신적) 퇴락과 (여성의 경우에는 자녀들의 장성과 폐경으로 오는) 우울을 이유로 하여 그들에 대한 순종과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장성한 자녀들이 희생한 부모에 대해 배신을 하고 있다는 형식을 통한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식의) 동정의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들이 원하는 것(보수적 순종과 가족의 화목)을 지켜줄 것을 요구한다. 즉, 특정한 도덕적 요구에 대한 이유가 관습적인 이유에서 (그들 나름의) 합리적 이유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사회적인 의식의 변화, 즉, 관습적인 행위의 정당성보다는 이성적,합리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의식의 변화를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중점에 놓인 부모에 대한 순종이라는 중심적 가치는 변화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일관된 형태로 지지되고 있다.

다음편은 연애 드라마에 대한 분석으로 계속.
2008/07/12 13:01 2008/07/12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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