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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07 탐구는 계속(2)
  2. 2006/08/06 탐구는 계속

탐구는 계속(2)

Ceteris Paribus? 2006/08/07 10:54

문제는 이러한 형태의 사고의 '진화'를 과연 진화라는 기존의 생물학적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이다. 故 스티븐 제이 굴드(할아버지)는 이러한 사고형태의 변화를 진화와는 다른 진보라는 개념으로 상정하여, 문화의 진보와 생물학적 진화를 다른 범주에 두려고 했다. 그가 이러한 해명을 한 의도는 당대 암처럼(?) 번지던 (E.윌슨의) 사회진화론의 부당성을 논박하기 위해서였음이다. (<풀하우스> 참조) 사회진화론은 말 그대로 문화와 같은 사회적인 요소들도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유사하게) 생존에 가장 유리한 형태가 살아남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을 주요 논지로 하며, 결론적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생존에 유리한 형태는 서구적인 형태의 문화이며, 이것이 가장 '우수한' 형태의 문화라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주장한다. 즉,스티븐 제이 굴드의 주장은 현재 존재하는 문화들 사이의 위계관계를 나눌 수 있으며, 서구적 형태의 문화가 다른 문화권의 생활양식을 잠식하는 것을 정당화하는데에 사용되어왔고, 사용될 수 있는 논리라는 데에 이러한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이러한 일부의 주장이 진화론 전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제창된 것이다.
나는 내가 위에서 주장한 논리, 즉, 사고과정이 생물학적 변화의 파생물로서 진화의 형태를 띠고 변화해왔음을 주장하는 것이 스티븐 제이 굴드가 염려한 형태로 변질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말하자면 생물학적 차이들이 사고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은 쉽게 인종주의의 형태를 띨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생물학적 차이가 인종이라는 요소는 포함하지 않는다는 과학적인 결과를 (누군가) 발표하기 전에는 얼마든지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에 공포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앞으로 이러한 공포감을 해소하면서, 논의의 안정성을 찾고자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글을 전개해 나갈까한다.

- 사고의 진화과정 : 동서양의 비교
- (새삼스럽지만 당연한) 다양성의 중요성
- 소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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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는 계속

Ceteris Paribus? 2006/08/06 00:29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 맥락도 없고, 뜬금도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지난 5000여년간 인간은 많은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날렸고, 수많은 태양을 손가락으로 가려왔다. 결국 아무도 그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삶의 본질에 대해 모든 인간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답은 얻어지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에 대해서 과연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과연 옳은 질문인가를 묻는다. 결국 질문에 대해 옳은 답을 무작정 찾아나서기보다는 과연 질문 자체가 답을 구하는 것이 가능한 질문인가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이른바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위해 형식적, 의미론적 형태의 명제를 분석하여(?) 우리가 던져왔던 질문,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는 답을 구할 수 없는 형태의 질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는 결국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암으로 사망한다. 이른바 언어론적 전회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올바른 질문을 거두어 냄으로서 올바른 답을 구할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임으로서 철학적 사유의 범주와 효과를 경제화한 것이다. 그러한 사고와 관련하여 튜링 기계와 같은 개념들이 발명된다. 그러나 결국 다시 한 번 그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국 그러한 질문이 옳은 질문인가에 대한 답은 여전히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튜링 기계도, 괴델의 논의도,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결국은 현 체계 내부에서 그러한 질문이 과연 '옳은' 질문인가에 대한 답은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알 수 있게 된 것은, 그러한 질문의 '올바름'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뿐.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말한 바처럼 '우리가 무지하다는 사실 만은 알고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질문에 대한 이후의 진행과정을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가 질문의 진정성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질문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여서 기존의 철학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본질' 자체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그러한 질문 자체를 빚어낸 인간의 사고 자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 사고 이전의 것, 즉, 생물학적인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고 자체가 인간의 생물학적 속성의 하나로서 발명(진화?)된 것이며, 이른바 '추상성'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형이상학적 인간의 사고과정이 실은 모두 유전자의 속임수라고 보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유연관계 내부에서 부차적으로 생긴 것, 특히 경제적 행위관계 내부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결국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답은 (기존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증적이며 실험을 위주로 하는 탐구를 통해 밝혀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이 두번째 질문을 내가 진행시켜나가야 할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면, 기존의 질문들은 모두 폐기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옳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쓸모없는' 질문의 형태이기 때문에. 나는 딱히 내가 위대한 인간이라고도, 새로운 것을 열 수 있는 인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질문이 나 혼자만의 생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두번째 질문이 설사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되는 하나의 돌연변이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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